박상영 대구가톨릭대 교수
박상영
대구가톨릭대 교수

두 달 전쯤, 국내외 한국학을 공부하는 학자들이 모여 서로 소개하는 자리가 마련된 적이 있었다. 모 대학의 교수가 자신의 학문 분야를 소개하고 있는데, 대뜸 어디선가 ‘아, 그건 정말 쉽잖아~!’ 하는 혼잣말 아닌 혼잣말이 크게 들려왔다. 다들 놀라 둘러보니, 그 주인공은 그 교수와 전공 분야도 완전히 다른, 여전히 포닥과정에 있던 나이 좀 있는 여성학자였다. 그러자 소개하던 교수는, “한 20년 넘게 공부해 온 저도 아직 이 분야를 다 모르는데, 누구는 쉽다하니, 오늘 제가 한 수 배우고 가야겠습니다.” 하며 여성학자의 무례함을 일축시킨 일이 있었다.

사실 이러한 무례함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본다. 목 디스크가 걸린 것도 아닐 텐데 반갑게 인사한 사람을 투명인간 취급하며 지나가는 교수들, 버스에 천천히 오르는 노인을 향해 빨리 타라고 소리치거나 급히 차를 출발시켜 버리는 운전사들, 아파트 경비원에게 있는 갑질 없는 갑질 다 하며 뉴스의 일면을 장식하는 사람들, 익명성의 보호막 뒤에서 막말을 적는 댓글러들, 여러 사람 앞에서 온갖 모욕적 언사를 서슴지 않는 직장 상사들 등…. 이루 셀 수가 없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이런 무례함을 많이 접하기에 무신경하지만, 사실 이는 결코 가볍게 넘기고 말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무례함은 타인의 인격체를 갉아먹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지타운대 크리스틴 포래스 교수도 그의 저서 ‘무례함의 비용’에서, 무례함은 사람들의 인지 능력을 빨아들여 산산조각으로 만든다 했고 이를 실험으로 증명하기도 했으며, 뇌과학자인 에드워드 M. 할로웰 박사도 무례함은 목격자와 피해자에게 뇌화상(brain burn·나쁜 기억이 한동안 기억 속의 수면 아래 자리 잡는 현상)의 흔적을 깊게 남긴다고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무례함은 왜 생길까? 그것은 바로 상대에 대한 공경과 배려가 없기 때문이다. 禮는 원래, 제사상을 의미하는 示자와 일 년 동안 길러낸 곡식을 넘치게 祭器에 담는 豊자가 결합된 글자다. 따라서 문자대로라면 天神과 地神에게 지극정성으로 제사를 지내는 절차를 의미한다. 신에게 제사 지낼 시, 공경함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아마 요식 행위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즉, ‘禮’에는 외면적 형식(질서)과 그 속에 공경과 배려라는 두 가지 뜻이 모두 함의되어 있다. 그런데 무례한 사람은 이 두 가지 중 보통 후자가 크게 결핍되어 있다.

예를 갖춘다는 것은 또한 무조건 남의 비위를 맞추란 뜻도 결코 아니다. 그것은 비굴함이지 禮가 아니다. 禮는 오히려 자기를 지키고 타인의 영역도 함께 존중함을 의미한다. 즉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백성은 백성답게, 이 ‘~~답게’를 잘 실천하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무례한 이들은 이 ‘~답게’의 의미를 모른다. 그렇기에 이들은 타자의 영역을 침범하고 뇌화상을 입히고는 스스로 솔직하다 착각한다. 어찌 보면 불쌍한 나르시스트들이 아닐 수 없다. 어느덧 또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다, 이맘때쯤이면 누구나 지난 공과를 짚어보곤 한다. 그 과정에서, 혹 타인에 대한 무례함을 범하진 않았는지 한번 되돌아보고, 나와 너를 함께 소중히 여기는 禮의 의미도 가슴 깊이 되새겨 보면 어떨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