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영 <br>수필가
정미영
수필가

남편의 모습에 모처럼 활기가 넘친다. 봉사 가는 주말 아침이면 다른 때보다 일찍 일어나 부지런을 떤다. 그를 보며 앞만 보고 달려온 우리 부부에게도 이제 주변 사람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는 걸 느낀다.

몇 년 전, 남편은 수지침을 배워 자격증을 땄다. 그러더니 회사 자매마을에 가서 봉사 활동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보람된 일을 하는 남편이 듬직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못마땅했다. 나는 바깥일, 집안일, 어린 삼남매 키우느라 힘이 든다고 잔소리를 해댔다. 처음에는 입 안에서만 얌전하게 맴돌던 말들이었다. 나중에는 가시가 섞인 채 입 밖으로 튀어나와 남편의 가슴에 사정없이 꽂혔다.

서로 얼굴 붉히기를 몇 차례 주고받던 어느 날이었다. 남편은 나에게 자신이 봉사하는 곳에 가보자며 조심스레 권했다. 나는 마지못해 따라나섰다. 한적한 바닷가 마을이었다. 차가운 바람이 목덜미에 파고들어 자꾸만 어깨를 움츠리게 하는 아침이라 그런지 오가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찾아간 마을 회관 역시 썰렁했다.

시간이 흐르자 할머니 한 분이 남편을 마주하고 앉았다. 할머니는 온 몸이 다 쑤신다고 했다. 남편은 할머니의 거뭇하고 투박한 손 여기저기에 침을 꽂았다.

뻗은 손이 힘들었던지 할머니가 팔꿈치를 허벅지에 대자, 기다렸다는 듯이 허리가 저절로 굽어졌다. 할머니의 허리는 꼬부라진 자세가 더 편하다고 부추기는 듯했다. 한참을 절하듯 그렇게 있었다.

남편이 할머니의 손을 뒤집어 새끼손가락의 상처를 가리켰다. 곪아 탱탱해진 것을 보고 가족과 함께 병원에 서둘러 가보라고 권했다. “가족은 무슨….”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속속들이 사정을 알지 못하니 코끝이 찡해지며 마음 한 켠이 아렸다. 잠시나마 따뜻한 시선으로 관심을 기울인다면 할머니의 꼭꼭 숨겨진 사연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이야기보따리 속에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나는 할머니의 어깨를 주무르며 말동무를 자청했다. 할머니는 조금 전의 침울한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이내 함박꽃 같이 환한 표정을 지었다. 이마의 주름살이 펴질 듯 소리 내어 웃기도 했다. 오랜 만에 이웃집으로 마실 나온 아낙네처럼 이야기를 쏟아 놓았다.

할머니는 침을 빼자마자 내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주머니를 뒤져 속에 든 것을 꺼냈다. 종이 부스러기에 섞여 사탕 한 알이 나왔다. 그 사탕을 손에 꼭 쥐어주고는 말했다.

“고맙데이. 복 받을 끼다.”

할머니의 눈가가 촉촉이 젖었다. 한 겨울 선착장에 묶여 있는 배처럼 사람이 그리우셨던 것이다. 모처럼 당신 걱정을 하는 이들과 얼굴을 맞댄 시간이 어쩌면 메마른 마음에 훈훈한 단비를 적셔가는 일이 되었을 터이다.

우리네 인생살이도 마찬가지이리라. 나부터 마음의 문을 열어야 상대도 내 손잡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처음에는 다가가기 힘들었지만 할머니에게 바투 다가앉으니, 모자란 것이 많은 나에게 정을 내셨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는 단순한 진리를 할머니에게서 배웠다. 가족이 아니면 어떤가, 내 마음자리에 누군가를 들여놓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힘이 필요하지 않았다.

남편은 내 손을 잡으며 부드러운 말투로 자신은 행복하다고 했다. 요즈음 가족 아닌 남에게 ‘복 받을 것이다. 고맙다’라는 말을 어디 가서 들을 수 있겠냐며 웃었다. 온기 머금은 웃음 때문에 그 동안 응어리졌던 내 시린 마음이 봄눈 녹듯 흘러내렸다. 나는 예민했던 내 몸의 신경들이 느긋해지는 것을 느끼며 사탕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수지침을 꽂으며 사람에 대한 정(情)을 덤으로 건넨 남편의 마음이 내 마음밭으로 또르르 굴러 들어왔다.

오늘 아침도 돋을볕을 맞으며 남편이 재바르게 움직인다. 봉사 활동을 나가기 위해 수지침 가방을 꼼꼼히 살피는 모습을 보며, 나 역시 남편을 뒤따르기 위해 부지런을 떤다. 그런 나를 남편이 자상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따스한 돋을볕이 천천히 나에게로 옮겨오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