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다리를 건너며 오늘은 강물이 험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가로등조차 하나도 안 켜놓은 것 같다고 느꼈다. 멀리 보이는 말없는 나무들도 어지러운 세상을 근심하고 있다.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다고, 내 정신이 내 정신 같지 않다고 생각하며, 그래도 내일은 대전에 부모님 뵈러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하며, 장난 삼아 산 플래시로 어두운 산숲을 비추어 본다.

마음 속으로 그 ‘민주주의’라는 것이 나를 아주 망쳐 놓았다고 생각한다. 차라리 모르는 것이 나았다고, 쓸데 없는 가치의식에, 목표에, 측정에, 비판에, 분노에, 이율배반과 환멸에, 나는 그렇지 않아도 망가진 몸과 마음 상처를 덧나게 하고 있다.

어두운 방에 작은 불을 켜고 가끔은 들춰 보리라 생각한 명호 형의 두꺼운 책을 심심파적 삼아, 잠도 오지 않으니까 편다. 명호 형은 참 큰 사람이다. 그는 어떻게 그렇게 ‘논어’를 새로 읽을 뜻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일까?

하, 배운다는 것은 무엇이냐? 하고 명호 형이 풀이해 놓은 것을 곰곰히 다시 생각해서 정리해 본다.

배운다는 것은 그러니까 첫째, 그냥 지식, 정보의 존재를 아는 것이 아니요, 그것을 익히는 것, 습관으로, 실천으로 만드는 것이다. 알고 행동은 다르게 하는 겉배움은 배움이 아니요, 알았으니 행동으로 옮기는 속배움이라야 한다. 둘째, 배우는 것은 즐거운 것이다. 나처럼 함께 길 가는 친구를 알아 그가 찾아와 즐거운 것이요, 이 배움 때문에 설혹 가난해도 원망할 것 없이 즐겁게 받아들일 줄 아는 것, 내 스스로를 닦으니 내실 있어 기쁜 것이다. 셋째, 또 뭐냐, 그러니까 배움이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지 않는 것, 그러니까 세상에는 나보다 나은 사람, 훌륭한 사람 천지요, 나만 못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도 실은 그렇지 않을 수 있음을 아는 것이다. 넷째, 배운다는 것은 늘 배움의 태도를 잃지 않기에, 이것은 내 생각이지만 쓸데없이 무겁지도, 위압스럽지도 않은 것이고, 뭣보다 고루해지지 않고 나날이 스스로 새로워지는 것이다. 그것을 가리켜 절차탁마한다고도 할 수 있다.

명호 형은 공자를 가리켜 기철학자라 했다. 주리론, 주기론 하는 기철학이 아니요, ‘나’를 다스리는 뜻과 방법을 알고자 하는, ‘나’ 철학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실제로 온전한 존재가 되는 것이 중차대한 문제니,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성낼 여가도, 여력도 없다. 다만 ‘나’를 위해 거울이 될 남을 알지 못할 것이 두려운 것이다.

하, 배운다는 것이 이리도 무서운 것이라니, 나는 멀어도 한참이나 먼 것이다. 먼저 세상의 근심을 밀어내고 내 스스로를 돌아보기로 한다. 다시 살아날 수 있다면, 살아갈 수 있다면, 지난 잘못들은 악몽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 <한국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