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손경찬의 대구·경북 人
‘라일락뜨락 1956’ 대표 권도훈

사람들이 다녀간 후, 텅 빈 가게에 앉아 나무를 보고 있으면 자신이 나무처럼 그 자리에 뿌리를 내리는 것 같다고 말하는 권도훈 씨.

때로는 나무가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

권도훈 대표가 처음 이상화 생가터를 발견했을 때, 그 집은 4년 동안이나 거주자가 없는 상태로 버려져 있었다. 그 집을 발견하기 전까지 그는 광고대행사 대표인 동시에 대학에서 겸임교수로 강의를 하던 시각디자이너였다. 동업을 하던 선배의 자살과 사랑하는 동생까지 잃은 이중고를 겪으며 정신적 공항으로 사업체와 강의를 모두 내려놓은 상태였다. 이전할 사무실을 찾아다니던 그가 우연히 그 집 마당에 발을 들였는데 그때 그를 사로잡은 것이 바로 권 대표가 ‘상화나무’라고 이름 지은 한 그루의 라일락나무였다. 온통 뒤틀린 상태로 비스듬히 누운 나무를 보며 그는 충격과 감동으로 얼어붙었다. 4년 동안이나 버려져 폐허나 다름없는 집에 감도는 어떤 기운이 그를 감쌌다.

 

“ 조앤 k 롤링이 엘리펀트라는 카페에서 ‘마법사의 돌’을 써서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듯이, 저도 다양한 분들과 문화교류를 하고 싶었어요.”

정신이 얼얼한 상태로 그 집을 보고 나오던 중 골목어귀에 붙어 있는 ‘이상화 생가터’라는 팻말을 발견했다. 그 순간 그는 와! 하고 함성을 울렸다. 그날부터 그의 생몸살이 시작되었다. 집은 갖고 싶은데 주머니는 텅 비었고, 그 집에 다가설 방법을 찾다 호된 몸살을 앓았다. 경제적 절벽에 부딪친 그가 찾아낸 것은 국토부 산하의 도시재생 사업의 방편이었던 분양보증 ‘허그(HUG)’를 통한 재생사업 프로그램이었다.

“이 집이 온전한 이상화생가 그대로인가요?”

“안타깝게도 생가는 허물어졌고, 라일락뜨락은 1956년에 새로 지은 한옥입니다.”

상화생가의 자료를 찾던 중 400평이 넘던 상화 생가터(서문로 2가 11번지)가 1956년에 4필지로 나눠진 것을 알았다. 웃방망치길을 끼고 있는 11-1번지는 상화의 사랑채 ‘담교장’이었고, 11-3번지가 바로 지금의 ‘라일락뜨락’이었다. 독립운동의 주역들이 모여서 나랏일을 도모하던 상화의 생가. 19세의 이상화 시인이 독립선언서를 만들어서 웃방망치길로 빠져나간 생생한 역사의 현장이 바로 이상화 시인이 ‘담교장’이라고 이름 붙인 사랑채였다.

이미 땅이 나눠지고 본가가 허물어져 주인이 바뀐 것까지는 어쩔 수 없지만, 권 대표는 이상화 시인이 시를 쓰고 독립선언문을 작성하던 생가터에 그를 지켜보던 200여 살의 라일락나무가 살아있는 것만도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상화생가를 모델로 도시재생 프로그램에 응모해서 당당하게 당선이 되었다. 그 어려운 과정을 통해서 그는 마침내 집을 갖게 되었고, 사면초가였던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가세가 기울어져 생가를 처분하고 여러 번 이사한 끝에 이상화 시인이 마지막 4년을 보낸 곳이 지금의 이상화 고택이었다. 이상화 시인이 돌아가신 날이 4월 23일인데, 공교롭게도 그날 한 날 한 시에 빙허 현진건 선생님도 세상을 떠났다. 4월에 태어난 이상화 시인은 4월에 그렇게 떠났다. 처음 상화생가에서 라일락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것을 보고 권 대표는 4월에 돌아가신 이상화 시인이 꽃으로 오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시각디자이너의 감성이 매우 문학적이다.

“본업과 전혀 다른 길인데, 어떻게 카페를 생각하게 되었어요?”

“커피를 좋아하는 이유도 있지만, 카페는 사람들과 쉽게 조우할 수 있는 곳입니다. 조앤 k 롤링이 엘리펀트라는 카페에서 ‘마법사의 돌’을 써서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듯이, 저도 다양한 분들과 문화교류를 하고 싶었어요.”

카페에 한 무리의 손님들이 들어왔다. 권 대표가 손님들을 위해 커피를 내릴 때 카페 안팎을 둘러보았다. 마당에 비스듬히 누운 라일락나무는 언제 봐도 정겹다. 카페테리어의 한편에 그림을 그리는 책상이 있고 책상에 대나무로 짠 등이 밝혀져 있다. 이안 맥밀런이 찍은 비틀즈의 ‘애비 로드’ 재킷 사진이 벽에 붙어 있었다. 상화생가의 주인답게 마스크를 끼거나 학생모를 쓴 이상화 시인의 초상화가 카페 곳곳을 지킨다. 권 대표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어서 이상화 시인의 초상화도 직접 그렸다. 사진인 듯 컷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이상화 시인과 권 대표가 서로를 살리는 듯, 그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친근감이 감돌았다.

사업 실패와 막냇동생을 잃은 슬픔으로 생의 바닥까지 내려앉은 권 대표는 상화나무를 보며 다시 살아볼 꿈을 가졌다. 가장 낮은 곳에 내려앉은 그에게 이상화 생가가 운명 같은 끌림으로 그를 당겼다고 여겨진다. 그는 그 끌림에 이끌려 4년간 버려져 있던 폐허에 안겨 자기만의 희망을 일구었다. 이상화 시인과 관련된 서적에서 문서상의 오류까지 찾아낼 정도로 그는 시인의 역사 찾기에 열중했다. 그러라고 권 대표를 그 자리로 불러들인 것인지.

 

대학 겸임교수이자 시각디자이너

광고대행사 대표로 숨가쁘게 살다

동업자 자살·동생의 죽음으로 방황

이상화 시인의 마지막 4년 함께한

200살 라일락 나무 품은 고택과 만나

카페 개설 후 제 2의 인생 시작

“코로나 거점 병원으로 날랐던 커피

죽음과 싸우는 의료진에 위로 됐길”

“상화생가를 중심으로 대표님의 인생이 바뀐 느낌이에요. 어떠세요?”

“사람들이 이상화 시인과 어떤 관계냐고 물을 때마다 존경하는 시인이라고 대답합니다. 그 외에 무슨 이유가 필요하겠어요. 그분은 목숨을 바쳐 시대의 불운과 싸웠고, 저는 그 시인의 정신에 고무되어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상화 시인을 증명하는 일. 권 대표는 그 집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다며, 그저 사람들이 쉬고 싶을 때 와서 쉬었다 갔으면 좋겠다고 한다. 시각디자이너였던 그가 강한 운명적 끌림에 의해 그 집에 머물게 된 것 역시 그는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거기엔 어떠한 계산도 있을 수 없고, 모든 것이 우연히 이루어진 자연스러운 만남일 뿐이라고 한다.

“대구의 중심에 이런 문학적 공간이 생긴 걸 저는 매우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문학을 생각하셨나요?”

“조앤 k 롤링이 자주 가던 카페를 생각한 건 사실이지만 저는 문학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곳이 본래 생가터였던 만큼 이상화 시인이 문학적 구심점이 되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의 웃음이 소탈하다. 문학과 동떨어진 방외인이어서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조용히 다가와서 머물다 가는 사람들이 작가들이라면, 그보다 자연스러운 만남이 어딨을까. 달리 말이 필요치 않다.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시대에 젊은 목숨을 바쳐 저항시를 읊던 이상화 시인의 생가터이고,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자라던 나무가 저렇게 의연히 버티고 있는 데야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실은 작가들이 편안하게 머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따져보면 작가들보다 외로운 이들이 있을라고. 누가 고립시킨 것도 아니고, 제 운명대로 스스로를 옭매는 자발적 고립자들. 그들이 조용히 머무를 곳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2년 동안 혼자 놀았다면서 그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했어요?”

“죽을 정도로 괴로운 순간에 저 나무가 저를 구해주었어요. 저 나무를 보는 순간 쇠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느낌이었어요. 시인이 시로 시대의 불운에 항거했다면 나무는 몸으로 말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4년간 집이 비어 있었는데도 나무는 저 홀로 꽃을 피우며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커피장사도 처음이었고, 정신적 공항 상태가 깊을 때여서 이 집에 머무른 지난 2년간 너무나 평화로웠다고 했다. 손님 없는 것이 오히려 다행스러울 지경이었다. 코로나 때문에 얼마간 문을 닫고 있는 동안 혼자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며 적응할 시간을 충분히 가졌다. 많은 위안을 받았다.

“코로나가 덮쳤을 때 병원으로 커피폭탄을 나르셨죠? 그 얘기 좀 해줘요.”

“마스크를 낀 이상화시인의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손님 중 한 분이 전화로 커피를 살 수 있느냐고 물었어요. 의료진들이 커피 마실 곳이 없다고.”

그 얘기를 듣고 그는 더치커피를 내려 폭탄처럼 생긴 작은 용기에 담았다. 한 방울씩 내린 커피를 용기에 담아서 병원으로 가져갔다. 밀려드는 환자들에게 치여 의료인들이 영안실에서 쪽잠을 자고 있을 때였다. 권 대표는 100인분의 커피폭탄을 2~3일에 한 번씩 코로나 거점병원으로 열 번쯤 날렸다. 커피 한 방울이 죽음과 싸우는 의료진들에게 위로가 되어 주기를 바랐다.

막냇동생이 마지막을 보낸 병원으로 커피를 나르며, 그는 살아서 장례식을 치른 동생을 생각했다. 사경을 헤매는 동생을 보며 그는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동생이 딱 한 번만 깨어나게 해달라고. 기적처럼 동생의 의식이 돌아왔다. 그는 동생에게 보고 싶은 사람 있으면 말하라고 했다. 그는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동생은 보고 싶은 사람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새벽에 조용히 떠났다. 동생의 죽음을 경험할 탓일까. 동산병원에 커피를 나를 때의 마음이 그랬다. 사람이 살고 죽는 문제에 비하면 살아가며 겪게 되는 크고 작은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어떨 때는 나무 같아요, 카페를 지키는 제 자신이.” 사람들이 다녀간 후, 텅 빈 가게에 앉아 나무를 보고 있으면 자신이 나무처럼 그 자리에 뿌리를 내리는 것 같다고 했다. 아무도 묶는 사람이 없지만 그는 스스로 그 달가운 형벌을 감당한다. 기꺼이.

/글 장정옥 소설가

(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