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현동덕여대 교수·교양대학
이재현
동덕여대 교수

“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 / 아- 뜸북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

일제 강점기에 활동했던 가수 고복수의 노래 ‘짝사랑’ 1절과 2절 첫 소절을 되뇌어 본다. 어느새 으악새와 뜸북새가 슬피 우는 가을이 가버렸다. 이렇게 슬프고 힘들게 2020년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

‘으악새’는 어떤 새일까, 2절의 ‘뜸북새’가 새 이름이니 1절의 ‘으악새’도 조류의 한 종류로 착각하는 이들이 있다. ‘손목인의 가요인생’이라는 책에는 ‘짝사랑’의 가사에 나오는 으악새가 무슨 새냐고 작사가인 박영호에게 직접 물었을 때 “고향 뒷산에서 ‘으악, 으악’하고 우는 새 울음소리가 들려 그냥 ‘으악새’로 했다.”라고 심드렁하니 대답했다는 기록이 있다. 새의 이름이라기보다는 새 우는 소리를 듣고 그냥 갖다 붙인 것이라는 말이다. 한때는 ‘으악새’에 대해 다른 설이 있었다. 으악새는 새가 아니라 풀 이름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으악새는 갈대와 비슷한 억새풀의 경기도 방언이다. 가을 바람이 불 때쯤 억새풀이 바람에 흔들리며 소리를 내는 것을 시적으로 표현했을 것이라는 설이었다. 그런데 노랫말을 쓴 장본인이 새라고 했으니 더 이상 논란의 여지는 사라진 셈인데, 아직도 이런 이야기가 여전히 떠돌아 다닌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곧,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이름을 작사가가 자기 마음대로 갖다붙였으니 나름 개연성 있는 다른 설이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제법 그럴싸하다. 작사가가 침묵하고 있었다면 ‘으악새 슬피 우니’라는 구절은 ‘으악으악’하고 우는 괴기스럽기까지 한 새의 소리로 이해하기보다 ‘억새’풀의 흔들리는 소리로 풀어내는 것이 짝사랑의 심경을 노래하는 데에는 더 잘 어울렸으리라.

듣는 이와 말하는 이, 쓰는 이와 읽는 이 사이의 언어적 약속이 잘 맺어지고 그 약속이 지켜져야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진다. 으악새를 새의 한 종류로 받아들이기 껄끄러운 까닭은 언어대중 사이의 사회적 약속으로써가 아니라 개인이 임의로 만들어 썼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노래로 불리고 있기에 으악새는 공공의 언어 마당에서 새의 이름이라는 지위를 그나마 확보할 수 있었을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슬세권’을 아는가? ‘보배’는 들어 봤는지? ‘슬세권’은 ‘슬리퍼를 신고 편한 차림으로 다닐 수 있는 역세권’이라는 말이고, ‘보배’는 ‘보조 배터리’를 줄인 말이다. 스마트폰과 좀비를 합쳐 줄여 만든 ‘스몸비’(Smombie)라는 영어식 신조어도 있다. 이런 새말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지금도 어디선가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가히 줄임말 신조어가 홍수처럼 밀려드는 시대가 도래했다. 인터넷 공간을 박차고 나와 젊은이들에게 많이 사용되고 있는 줄임말 신조어들은 세대 간의 소통 부재 현상을 점점 키워가고 있다. 이러한 말들로 세대 간뿐만 아니라 같은 세대 안에서 소통이 어려운 경우가 생기기까지 한다.

‘만반잘부’(“만나서 반가워 잘 부탁해.”)라고 하며 줄임말 앞에 억지로 머리 조아리는 일은 없어야 할 텐데, 가뜩이나 코로나로 어려운 상황에서 소통의 어려움까지 겹쳐 무지근해지는 12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