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친구는 오래 가기 어렵다고들 한다. 철들고 보탬 되고 안 되고를 다 아는 때 만나니까. 그래도 안 그렇다고 생각될 때가 많다.

언론사에서 일하는 K가 소백산에를 가자고 한 게 벌써 두어달 전이다. 약속은 시원스럽게 잡았지만 막상 날이 닥치니 앞뒤로 일정이 꽉 차 버렸다. 그래도 이번만은 가야겠다고, 아닌 말로 이를 악문다.

풍기 소백산 산속에 대학 동창 하나가 굴을 파고 앉았다. 쑥마늘 먹고 사람 되겠다는 단군신화도 아니고, ‘논어’며 ‘예기’며 하는 한문 고전 공부에 어언 24년 세월이 흘렀다. 나나 K와는 학번은 같은데 나이는 물경 13년이나 많은, 시청 공무원 하다 늦깎이로 대학 들어왔던 형님.

옛날엔 참 가난하기도 했다. 나도 보증금 50에 월 5만원 월셋집에 자취까지 했지만 이 형님은 더 가난해서 남들 대학 갈 때 엄두도 못 냈었다 했다. 대학 다닐 때도 남 모르게 용산역 앞에서 감자를 팔았다던가 하는 이야기가 내 기억에 희미하게 남아 있다.

지금 아파트 단지들에 재개발이 거의 다 된 봉천동, 신림동, 노량진 일대에 판잣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산윗집은 물을 대려면 펌프질을 하고 ‘푸세식’ 변소가 일반인 시절이었다.

그렇게 가난했는데도 그는 학교 다닐 때부터 공부를 즐겼다. 남들 놀고 데모할 때 그는 공부가 목말라 늦게 대학 온 사람답게 강의를 듣고 레포트를 길게 내는 버릇을 들였다.

그래도 졸업 하고는 사회로 나가야 했다. 곧 학원 강사가 벌이가 되는 시절이 닥쳤고 그에게도 ‘황금기’가 펼쳐졌다. 대학 시절 ‘말년’에 결혼을 한 그에게는 부양해야 할 식구들이 있었다. 그때쯤에야 먹고 살 수 있었건만 그는 오히려 서울 강남 한복판에 사무실을 얻어 서당을 열었다. 스스로 한문을 공부하며 돈을 받지 않고 가르치기 시작한 것.

K는 풍기 소수서원 주차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안동이 고향인 그는 처음엔 공대에 들어갔다 다시 시험을 보고 국문과로 들어왔다. 집에서는 외무고시를 본다 하고 학교 앞에 방을 하나 얻었지만 고시는 고사하고 밤낮으로 나같은 한량들에게 시달리기 일쑤였다. 나보다 한두 살 많았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상대해 주던 그는 아버님을 일찍 여위었는데도 낙천가의 기질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소백산 산중에서는 이날 밤 사내 셋이서 밤하늘 별을 헤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형님의 백구 네 마리가 옆에 다가와 앉아 산속의 웃음소리에 귀를 있었다.

속세를 떠나 이렇게 깊은 산속에서 홀로 공부를 계속하는 형님과 나를 여기로까지 이끌고 온 K. 우리는 이날 밤 세월을 잊어버린 옛날 사람들, 친구들이었다. ‘유붕이 자원방래하니 불역낙호아(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 <한국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