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조선의 예언가 남사고 생가와 성류굴

격암 남사고 유적지.

울진의 옛 이름이 선사(仙<69CE>)인데 중국 한나라 무제 때 장건이 선사를 타고 은하수에 올라 직녀를 만나서 베틀을 괸 돌을 얻어왔다는 고사다. 이런 신비한 이름의 울진은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자연환경으로 천년 석회석 자연동굴인 성류굴이 왕피천 옆에 바싹 붙어있어 신비로움을 더한다. 그리고 높고 깊은 계곡의 줄기만큼이나 얽힌 인생에 희망을 던져주는 예언을 한 격암 남사고의 생가와 만화가 이현세의 벽화거리가 있다.

 

격암 남사고 초상화.
격암 남사고 초상화.

#. 신비한 울진 성류굴과 조선의 예언가 남사고

우리나라는 제주도와 태백산을 중심으로 천년동굴이 분포되어 있다. 제주도는 화산으로 인한 용암동굴이라면, 울진의 성류굴은 석회암 동굴로 이루어져 있다. 태백산맥의 석회암지대(카르스트지형)가 물에 녹으면서 생긴 것인데 단양의 고수동굴이 대표적이고 영월의 고씨동굴, 북한 영변에 동룡굴, 삼척의 환선굴, 울진은 성류굴이 같은 지형으로 형제같이 분포되어 있다.

울진의 성류굴은 왕피천 물이 흘러들어 석회암 지형에 침식작용을 일으켜 만들어진 동굴로 1963년에 발견했다는데 잊혀졌다가 알려진 것이 1963년이란 것이지 신라시대부터 있었다는 명문이 있어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근남면에서 왕피천을 따라 성류굴 가는 길에 플래카드가 바람에 나부끼는데 필자가 살고 있는 경주 글씨가 보여 한 번 더 보게 되었다. “축 김진영 경주시 5급(사무관)진급 노음초 36회, 제동중 3회 동기회” 삭막한 도시에서는 볼 수 없고 우리나라 구석구석을 다니다보면 000자녀 박사. 000아들 사법시험합격. 003남 00장군진급 등등으로 서로 격려해주고 기뻐해주는 인정이 남아있다. 중소도시 학교 주위에는 00회 졸업 00합격, 00 시장, 00 국회의원 당선 등등이 심심찮게 붙어있다.

 

매화 벽화. 호기심이 없으면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다.
매화 벽화. 호기심이 없으면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다.

왕피천 건너편에서 성류굴을 살펴보니 물가에 높다한 바위산이 우뚝 솟아 온 가을 햇살을 받고 있었다. 코로나 때문에 사람 구경하기가 어렵다. 매표소에 두 남녀 관리인 외는 아무도 없는 성류굴에 안전모 쓰고 혼자 들어갔다. 중국의 동굴같이 배를 타고 넓은 동굴 안을 보는 것이 아니라 미로 같은 협소한 동굴을 둘러보면서 문득 임진왜란 때 이 동굴에 피난민들이 들어갔다가 왜군들이 불 지르고 입구를 막아버려 고통스런 죽음을 당한 그 찢어지는 참담함이 상상만으로도 아픈 고통이 느껴진다. 그리고 임란 때 근처 절에서 불상을 이 동굴에 모셔두었다고 성류굴(聖留窟)이라 했다. 삼국시대 이전에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울진에 신라의 봉평비가 존재하듯이 동해안 강릉(하슬라주)까지 신라의 영역이라 진흥왕(540~576년)이 성류굴에 다녀갔다고 석각해놓았다. “560년 6월 잔교를 만들고 뱃사공을 배불리 먹였다. 여자들은 교대로 보좌하며 펼쳤고, 진흥왕이 다녀가셨다. 세상에 도움 된 이(보좌) 50인이었다. (庚辰6月日 柵作<8257>父飽 女二交右伸 眞興王擧世益者五十人)”

이 성류굴이 생성연대는 공룡이 지구상에 출현한 2억5천만년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월송정과 마찬가지로 신라 화랑 4명과 신선들이 신비한 절경에 놀았다고 선유굴로도 불린다. 삼국유사에는 신문왕 아들 보천 태자가 장천굴(掌天窟)에서 수구다라니경를 암송했는데 2천년 된 굴의 신이 불교에 감화되었다. 그 보천태자가 머물렀다고 해서 성류굴이라 했다.

성류굴을 나와 왕피천 건너 산속 수곡리로 들어가면 격암 남사고 생가터와 유적지가 나온다. 여기도 유물관에 관리인 한 명 외는 아무도 없다. 남사고의 생가터로 추정하여 집을 짓고 서원과 전시관을 그 앞에는 공원을 조성해 놓았는데 생가터는 아무래도 저 산 밑이지 이 곳은 아닐 것이다.

세상이 어지러우면 비기와 예언서 등이 나온다. 남사고가 살았던 조선중기는 거센 파도가 속으로 일렁일 때이다. 이 시기에 태어난 남사고(1509~1571년)는 유학자로써의 소양을 갖추고 그 밝은 지혜를 바탕으로 예언서를 쓴 것이다. 시골의 향시에는 합격했으나 대과에는 합격하지 못하자 “자네는 남의 운명은 잘 알면서 자기운명은 알지 못하고 해마다 과거시험에 헛되이 나가는가.” 그는 웃으면서 “사심(私心)이 움직이면 술법도 어두진다네.”이처럼 예언에는 능통했지만 자신의 사익(私益)을 위해서는 사용하지 않았다.

 

건너편에서 바라본 성류굴 입구.
건너편에서 바라본 성류굴 입구.

#. 독립운동가 백운 주진수와 만화가 이현세의 벽화거리

우리나라 마을이름을 보면 유식하게 매화마을을 매곡으로는 많이 사용하지만 울진 매화면은 아예 알기 쉽게 매화면(옛 원남면)으로 해버렸다. 매화면 소재지로 들어서면 내륙으로 들어와 있는 산골 마을이라 아늑하다. 평화로운 시기라면 정을 나누며 오순도순 정겹게 살 것인데 나라 잃으면 모든 것이 산산조각난다. 이곳 매화에는 울진교육의 요람이고 항일운동의 발상지이다. 백암 주진수(1878~1936년) 애국지사는 울진(죽변면 후정리 매정동)에서 태어나 일생을 교육과 독립운동에 헌신한 애국지사였다.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1907년 지역유지들과 울진에 매화만흥학교를 설립하였고, 신민회 강원도 책임자로 활동하며 사동, 영해, 안동, 강릉 등에 학교 설립을 도왔다. 김구 선생과 조선총독부와 대립되는 도독부를 설치하여 활동하다 총독암살사건(일제의 조작)에 연루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의 옥고를 치루고 만주로 건너가 이시영, 이상룡 선생들과 신흥강습소를 세우고 만주 3·1만세운동을 이끌었다. 특히 김좌진, 이범석 장군의 참모로 청산리대첩에서 17명의 일본군을 죽이는 공을 세운다. 1926년에는 고려혁명당 중앙위원으로 당을 이끌기도 하였다. 그토록 열망하던 조국의 독립은 보지 못하고 1936년 59세에 주창열, 주창근, 두 아들을 남기고 만주에서 생을 마쳤다.

가을햇살 받은 매화면 소재지 벽에는 매화대신 예술이 꽃피어 있었다. 천천히 걸어가면서 만화를 영화 보듯이 살펴보았다. 마치 영사기 돌아가듯이 발걸음 속도대로 필름 장면이 바뀐다. 이현세 고향이라고 만들어 놓았는데 부모님 고향이고 자신은 엄마 뱃속에서만 고향이었다. 울진에서 살 방법이 없어 어머님이 포항 변두리 농촌에 이사하여 농사짓다가 한 많은 사라호 태풍 때 농경지가 휩쓸려 더이상 대안이 없어 경주에 정착한다. 미술대학을 가려했으나 색약으로 쓰라린 가슴안고 포기하고 만화가의 길로 접어들어 ‘공포의 외인구단’, ‘까치’ 등으로 천대 받던 만화가 일약 대중의 마음을 뒤흔드는 위업을 이루었다.

 

2억5천년 자란 성류굴의 석순.
2억5천년 자란 성류굴의 석순.

#. 가을을 슬프게 하는 말들

한 분야에서 정상에 오르면 말이 진리가 되고 철학이 된다. 벽에 그려진 만화 대사 중에 걸음을 멈추게 하는 몇 문장들이 보인다. “벽을 눕히면 길이 된다.” “네가 원하는 곳에 집중해” “아부지(아버지)요 김유신이 더 씨(쎄)지요?” 그러자 아부지는 “끝까지 살아남는 놈이 씬(센) 놈이다.” “이 노무 세상에서는 살아남는 놈이 씬(센)놈이다.” 다음 문장에서 억센 경상도 특유의 특질이 필자를 묘한 생각으로 끌어간다. “주디(입) 닥치라 마! 돈은 인자부터 천지 빼까리(엄청 많이 무한대)로 들어올끼다.”

“천지 빼까리” 이 말은 경상도 사람들이 옛적에 하던 말인데 올 가을 나훈아 콘서트 때 소크라테스를 갖고 논 “테스 형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 노래 가사를 던지면서 이 말이 회자되었다. 보통사람이 공인된 방송에서 했다면 역겹지만 어느 단계에 들어간 사람은 어떤 말을 해도 천박하게 안보이고 설득력이 있다. 맞아 가면서 터득하여 챔피언 된 권투선수 홍수환은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였다. 아무리 위대한 사람도 일반 사람들에 각인되는 것은 한 구절이다. 올 가을에 생을 마감한 삼성 이건희 회장은 ”마누라와 자식 빼고는 다 바꾸라”만 남았다.

이 가을에 유독 슬프게 하는 것은 코로나도 있지만, 국가를 개인 기업으로 활용한 이명박 전 대통령이 17년 감옥 가면서도 창피하고 송구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나를 가둘 수는 있어도 진실은 가둘 수 없다”고 진실을 모독 한 것이 슬프다. 그래서 MB회고록을 본 노회찬은 “786쪽 어디에도 철학과 고뇌는 없고 변명과 합리화만 넘쳐나는군요. 회고록은 이렇게 쓰면 안 된다는 소중한 교훈을 주는 책, 돼지고기 한 근 값인데 돈 주고 사서 볼 책은 아닙니다”라 했다. 정치인 아닌 고건, 안철수, 반기문 등등 다크호스로 잠시반짝이다 사라지는 것이 대선 지지율인데 현직 윤석열 검찰총장이 대선 지지율이 높다고 난리다. 자기는 부하가 아니다 해 놓고 아래 검사들은 부하로 취급한다. 대전 지검에 갈 때는 때지어 마중 나온 검은 양복 입은 검사들 보니까 보스 마중 나온 부하 같고 “등 두드려주려 왔다”고 하는 말과 행동이 꼭 조폭 두목 같고 안마 총장 같아 슬프다. 국민을 불모로 정의를 부르짖는데 자기들 식구들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선별적 고무줄 정의하는 검사들도 슬프다. 1963년 JP(김종필)는 일본 오히라 마사요시(大平五芳) 외상과 비밀회담할 때 독도를 “손톱만 한 섬, 차라리 폭파시켜 없애버립시다”에서는 섬뜩한 슬픔을 느끼지만 그래도 “자의 반 타의 반”이란 유명한 말을 남기면서 정치는 허업(虛業)이라며 “국민들에게 나눠 주는 것이 정치인의 희생정신인데 정치인이 열매를 따먹겠다고 하면 교도소 밖에 갈 때가 없다”는 바른말을 했다.

50년 전(1970년)에 하루 16시간 재봉틀 미싱공들이 시급 100원 받을 때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며 한국노동운동의 불꽃을 피우고 약자를 사랑하고 분신한 22살 전태일의 외침이 아직도 이어지는 현실이 슬프다. 대선패배를 불복하는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도 슬프지만, 전 재산 29만원 뿐이라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뻔뻔함도 슬프고, 4·15총선을 부정선거였다고 외치는 사람들도 슬프다.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강남에 건물주 되는 것이 꿈”이라는 청소년들이 슬퍼지는 현실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슬픔을 딛고 희망을 안고 살아야 한다. /글·사진= 기행작가 이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