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헛제사 밥에 꼭 곁들이는 안동식혜.
안동 헛제사 밥에 꼭 곁들이는 안동식혜.

안동 하고도 한참 더 들어가는 시골 접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할머니가 해주시는 짠지와 나박썰기 한 무가 동동 뜨는 김치를 먹으며 살았더랬다. 내게 김치는 국물이 시원한 동치미였고 배추에 고춧가루 버무린 양념을 묻힌 건 짠지였다. 또 한 가지, 말간 국물에 밥알이 동동 뜨는 건 감주이고 고춧가루와 생강 맛이 나는 음료수는 식혜였다. 칼칼한 안동식혜.

제사가 많던 우리 집은 겨울이면 늘 식혜가 숭늉처럼 밥상물림에 따라나왔다. 할아버지 상에는 강정과 함께였고, 우리에게는 인절미 구운 것이 떨어지면 생고구마를 깎아서 함께 차려졌다. 늦은 밤 속이 출출하던 참에 살얼음이 살살 낀 식혜 한 그릇을 마시면 겨울밤이 더 든든했다.

식혜의 역사를 알아보니 이랬다. 안동은 양반이 많이 사는 곳이라 제사가 많다. 좋은 재료로 조상님을 모시는 기름진 음식을 만들었다. 만들며 또 제사 후에 잘 못 먹던 고기와 생선 등을 먹게 되니 속이 편치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 소화제 역할을 하는 음식이 필요했는데, 이때 만들어진 게 안동식혜라는 것이다. 보통 식혜는 그냥 밥풀이 동동 뜨는데 안동식혜는 고춧가루 넣고 맵게 생강도 첨가한다. 거기에 무채도 들어가니 소화제로서 그저 그만이다.

조상님들이 간만에 고기를 먹는 후손들이 배앓이를 할까 봐 소화가 잘 되게끔 배려해서 만든 음식이다. 매운 고추와 생강이 소금만 들어간 제사음식의 밍밍함을 눌러 준다. 더불어 채 썰어 넣은 무는 소화제 역할이다. 접실에서는 저녁 늦게 무를 깎아 먹는 습관도 있었는데 생무를 먹고 나면 트림이 잘 나온다. 소화가 잘 된다는 뜻이다. 안동식혜와 같이 음식을 먹으면 아무리 먹어도 체하거나 속이 불편하질 않다. 안동 사람들은 안동식혜가 나와야 음식이 다 나온 걸로 알 정도다.

안동식혜를 처음 보는 사람은 아마도 먹기가 쉽지가 않다. 비주얼은 물김치 비스무리하지만 찬이 아니라 음료수이기 때문에 기대하는 맛이 감주에 가깝다. 그러니 첫입에 인상을 찌푸리고 만다. 남편도 처가에 와서 장모가 권하는 손길에 못 이겨 한 모금 마시고는 눈이 동그래졌다. 워낙 식성이 좋은 사람이라 조금씩 먹다 보니 이젠 한 그릇 비워내, 친정엄마의 기분을 맞춰 주는 경지에 이르렀다.

김순희수필가
김순희
수필가

안동의 카페 메뉴판에는 안동식혜도 있다. 포항 대부분 식당에 반찬으로 밥식해가 오르는 것처럼. 밥풀이 많이 보여 ‘밥’ 자가 앞에 붙어 있다. 가자미나 홀때기를 주로 넣고 삭힌 발효음식이다. 식해는 주로 함경도, 강원도, 경북 등 동해 지역에서 널리 발달했다. 소금 생산이 많은 서해 지역이 생선을 소금으로 절여 염장 발효한 ‘젓갈 문화권’이라면, 상대적으로 소금이 귀한 동해는 쌀이나 기장, 조 등 곡물로 발효시킨 ‘식해 문화권’이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다니러 가면, 휴일 새벽에 아들을 깨워 감포항에 나가셨다. 배에서 금방 내린 생선을 사기 위해서였다. 멸치로 젓갈을 담고 가자미로는 식해를 만들어 단지에 넣고 방 윗목에 헌 이불을 덮어 놓았다. 발효가 잘되게 하는 방법이었다.

포항하고도 한참 더 들어가는 장기면으로 시집온 지 30년이 다 되어 가지만 아직 식해를 반찬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남편이 안동식혜 한 잔을 호로록 비워내는 거에 비해 나는 노력이 부족하다. 비린내가 날 것이다며 입에 대지도 않은 탓에 아직도 식해의 깊은 맛에 발을 들여 놓지 못했다. 식해뿐만 아니라 다들 좋아하는 회도 선호하지 않는다. 그러니 집에서 생선 굽는 비린내는 거의 풍기지 않는다.

어릴 때부터 먹지 않았던 탓인지 조개구이를 저녁으로 먹었던 날에 밤새 배앓이를 하며 밤을 지새우고, 회가 풀코스로 나오는 곳에서 대접을 받았던 날에는 먹는 중에 체하기도 했다. 생선이 귀한 식혜 문화권 사람이 식해 문화권에 들어와 겪는 시차 적응 현상이다. 30년을 채우면 나아지리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