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젊은 사람들 비평의 핵심 개념 가운데 하나가 이른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PC)이라고들 한다.

그러니까 이 사조는 1980년대 미국에서 먼저 쓰기 시작한 것이다. 또 이 말은 말의 표현, 용어 사용 같은 언어적 문제에 먼저 적용되어 사용된 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요즘 한국 사회 또는 비평계에서 이 말은 그런 시작 단계의 의미에서 상당히 ‘멀어져’ “전통적 관념을 교정하기 위해 새로운 규범을 따르는 태도” 전반을 가리키는 말로 변모되었다고 한다. 또 그러면서 다문화주의, 생태주의, 페미니즘 같이 첨예한 문제를 둘러싼 비평적 경향을 ‘반드시’ 수용할 필요가 있다는, 다소 ‘강제적인’ 가치관념을 가진 입장들을 두루 사용하는 말로도 사용되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 프랑스에서 이슬람교, 알라, 마호메트를 풍자하는 수업 활동을 열었다가 난데없이 ‘광신’에 가까운 18세 청년에 의해 교사가 참수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여기서만 사태가 끝나지 않고 또 바다를 건너와 여러 사람의 인명을 살상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여기에 다시 말레이시아의 오래된 지도자 마하티르 모하맛은 얼핏 보편적 휴머니즘에 어긋나는 듯한 발언으로 논란이 일고 있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태평양 바다 건너 미국에서는 지금 새로운 대통령 선거가 벌어져 트럼프와 바이든이 ‘생사를 건’ 경쟁을 벌이다 마침내 바이든이 어렵게 승리를 거두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공화당과 민주당은 서로 자신들이 옳다고, 상대방이 미국사의 재앙이라도 되는 듯 난리법석을 피웠지만, 나 자신의 정치적 선호와는 별도로 과연 어느 쪽이 옳은가를 지금 간단히 판별할 수만은 없다고도 생각한다.

서로 대립하는 두 세력이 커다란 힘들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또 그들 모두가 역사의 진리를 대변하고 있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해서, 그들 중 어느 한 쪽은 반드시 ‘정치적 올바름’을 담보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더 나아가 나는 이 ‘정치적 올바름’의 지나친 요구가 한편으로는 사회적 교류와 교섭, 타협을 어렵게 하고 유머라는 점이지대를 소멸시키며 시민들을 모범답안 내기 쪽으로 몰아붙일 위험성도 없지 않다고 생각한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들만의 군림, 그들에 의한 통치만큼 위험한 것도 없지 않은 것이다.

사회는 확실히 더 나아져야 하고 우리가 더 편견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를 위해서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의식하지 않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관대해지는 것, 적대하지 않는 것,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공동체적 유대감일 것이다.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 <한국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