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뜨기인 저는 오학년 때 대구로 이사했습니다. 이층집도 수세식 화장실도 한 번 본 적 없는 깡촌 아이 앞에 펼쳐진 휘황찬란한 도회의 파노라마는 차라리 공포에 가까웠습니다.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그 어린나이에 결코 원한 적 없던 묵언수행을 감행해야 했을 정도였습니다. 웃지 못 할 시절이었지요. 제 생애에 우울기가 있었다면 그때가 시초였을 거예요.

크고 작은 여러 체험을 겪었습니다. 그 중 의아스러웠던 것 중의 하나가 ‘으’와 ‘어’ 발음을 구별하지 못하는 친구들이 많았다는 것이에요. ‘이층으로 올라간다’라고 하면 될 것을 ‘이청으로 올라간다’라고 하거나 음악 시간이라고 하면 될 것을 ‘엄악’ 시간이라고 발음하는 것이었지요. 멀쩡하고 예쁜 이름인 이은진도 ‘이언진’이라고 바꿔 불렀습니다. 심지어 ‘언진(은진)이가, 언진이가?’하면서 제가 듣기에는 똑같아 뵈는 발음으로 그들 식의 ‘으, 어’ 발음을 구별하기까지 했습니다. 생경하고도 기이한 일이었습니다.

시골에서는 어느 누구도 그 두 음절을 정확히 발음하지 못하는 친구들이 없었습니다. 철이 들고 난 뒤 그것이 단순한 언어습관 이하도 이상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투리가 그렇듯 윗세대가 그렇게 발음하니 아랫세대도 별 뜻 없이 그렇게 배운 것뿐이었지요. 원래 인간은 자기 울타리 안에서 자기 식으로 그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존재니까요.

오랜만에 전국구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무슨 말 끝에 ‘thanks to’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생스투’라고 제가 발음하자 나머지 친구들이 동시에 웃었습니다. 왜 웃는지 저는 전혀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다시 그 발음을 하게 되었을 때, 친구들이 좀 전보다 더 넘어갔습니다. ‘땡스투’로 말해야지 ‘생스투’라는 말은 너무 어색하답니다. 한 번도 그렇게 말하는 방식이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었기에 적이 당황했습니다. 어차피 영어 발음으로 할 것도 아닌데 생스투나 땡스투나 그게 그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그게 이상하다는 거지, 하며 저는 고개만 갸웃거렸습니다.

소심한 저는 ‘thanks to’를 우리말 식으로 어떻게 발음하는 것인지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습니다. 검색 상으로는 ‘땡스투’나 ‘생스투’나 그게 그거였습니다. 비슷한 비율로 검색되는 걸로 보아 그 말 자체는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단순히 땡스투냐 생스투냐의 차이가 아니라, 제 발성법에 문제가 있었겠다 싶었습니다. 경상도식 사투리 발성에서 오는 특이함 때문에 친구들이 웃었겠구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마치 어릴 적 ‘으’ 와 ‘어’를 구분하지 않고 -그들 나름으로는 구분을 했겠지만- 발음하던 도회지 아이들을 보면서 제가 이상하다고 느꼈던 것처럼 친구들도 그런 마음이 아닐까 짐작했습니다. 제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것이 그들에게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 저로선 이상했듯이, 그들이 이상하다고 생각한 것이 제겐 이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역시 그들에겐 이상할 수도 있다는 사실만을 확인했지요.

북 토크 진행을 한 뒤, 제 음성이 녹음된 파일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비염 섞인 어색한 음색에다 사투리 높낮이가 선명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꺼버리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더 충격적인 면을 발견했습니다. 저 역시 미세하게 으, 어 발음을 완벽하게 해내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지요. 경상도식 특유의 발성법이 굳어져 어떤 부분에서는 분명히 ‘으, 어’를 제대로 구분하지 않고 쓰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지요. 그제야 왜 친구들이 제가 ‘생스투’라고 내뱉었을 때 웃었는지 온전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발성 자체에 사투리 버전이 녹아있으니 표준어를 구사하는 입장에서는 어색하게 들릴 수밖에요.

김살로메소설가
김살로메
소설가

어떤 이의 말과 행동은 스스로 한 것이되 스스로의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발설하는 순간부터는 그것은 상대자의 것, 즉 받아들이는 자의 몫이 되는 것이지요. 당사자는 궁궐을 지어도 상대는 초가를 볼 수 있습니다. 전하는 자는 열매를 전해도 받는 자는 씨앗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전하는 자의 말은 해석하는 자의 귀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진실과는 상관없이 내 의도와 상대의 해석은 같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배우의 무대 인사가 생각납니다. “내 의도와는 다르게 해석 되어도 괜찮다. 관객들이 느끼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어떻게 받아 들이냐는 것은 순전히 상대에게 달렸습니다. 언행의 전부를 상대가 이해하기를 바란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고 욕심입니다. 나는 말하고 상대는 해석하는 것, 이것이 세상 이치니까요. 세상엔 수많은 밥이 있고, 그 밥을 먹는 방식은 입맛마다 다릅니다. 오해가 풀리기 전까지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해석한 그것이 정답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의 교훈, 어떤 대상이나 현상이 이상하게 보이는 것 이상으로 스스로도 타자에게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