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수백 대구가톨릭대 교수·한국어문학과
서수백
대구가톨릭대 교수·한국어문학과

새집으로 이사를 하면서 내 키만한 녹보수 한 그루를 거실 한편에 들여 놓았다. 그간 여러 사람들이 좋은 마음으로 나에게 주었던 그 많은 화초들을 살피지 못하고 말려 죽이고 말았던 무책임하고 게으른 내가 아니었던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또 다시 잎이 무성한 식물을 집에 들여 놓은 것은 실내 공기 정화의 효과도 있다고 하고, 녹음을 보면 쌓인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기분을 많이 느꼈기 때문이다. 녹색을 많이 보는 것이 와병(臥病)을 줄인다는 어느 의학 프로그램에서 들은 이야기도 의식을 했던 듯싶다. 순전히 내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식물원 주인이 나에게 물은 자주 줄 필요는 없고 열흘에 한 번씩만 주면 된다고 했다. 수월하게 집안에서 녹음을 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 한층 더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역시 나는 열흘에 한번 물 주기, 그 수월한 일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살았다. 멀지도 않은 곳에 있는 한 그루 나무인데도 말이다. 어느 날 녹보수를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무성한 잎들이 지칠 대로 지쳐 축 쳐져 있었다. 그제야 나는 얼른 물 한 바가지를 떠와 나무에 주었다. 더 놀란 것은 물을 준 지 불과 몇 분이 지나서 지친 잎들이 모두 힘 있게 일어나 푸르른 빛을 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에 왜 그토록 감정이입이 되던지…. 식물도 생명이 있으니 당연한 현상인데 내가 너무 감상에 취했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눈치’가 없었다. 누군가는 날더러 ‘눈치가 백단’이라고 하는데 왜 지쳐가는 나무에 대해 나는 눈치를 발휘하지 못했던 것일까. 그간의 내가 본 ‘눈치’의 의미와 가치는 무엇인가. 눈치 보지 말고 당당하게 살라는 말을 흔히들 한다. 자존감을 불어 넣는 기분 좋은 격려다. 그런데 이 말이 문득 우리를 ‘자기중심주의’, ‘이기주의’로 더욱 빠지게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코로나19로 우리의 생활 패턴이 바뀌면서 사람들은 더욱 예민해지는 듯하다. 그리고 자신에게 더욱 몰입되어서 심리적인 폐쇄성은 더욱 커져가는 듯하다. 모두가 눈치 없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눈치’는 ‘남의 마음을 그때그때 상황으로 미루어 알아내는 것’이다. 나 자신의 안위와 편리를 위한 눈치보다 힘겨움과 곤란함을 외치고 있는 주변에 눈치를 발휘해야 한다. 나한테 무익한 일이라고,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내 자신 내 가족이 더 중요하다고 외면하는 습관적 가치관이 우리의 지혜로운 눈치를 더욱 감소시킬 수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그 눈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더 가지는 노력을 하자. 정치인이, 공직자가, 교육자가, 부모가, 자식이, 청년이, 청소년이, 우리 각자가 이타적 눈치를 볼 줄 알아야 한다. 그 가치 있는 눈치를 많은 사람들이 가질 때 우리 사회에 녹음의 빛이 골고루 퍼지고 날로 건강해지는 세상이 될 것이다. 이익과 성과의 중심을 ‘이타(利他)’에 두는 ‘눈치 있는 삶’, ‘눈치 보는 삶’의 시너지 효과가 얼마나 큰지 녹보수 한 그루에서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