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옮겨지은 수난의 망양정

온통 바다를 안고있는 옛 망양정.

#. 선조들이 남긴 망양정의 그림과 글

삼면이 바다로 둘러쌓인 우리나라의 해안에는 경치 좋은 절경이 많지만 기암괴석과 어우러져 푸른 물결 넘실대는 동해안이 단연 손꼽힌다. 그 중에서도 관동팔경이 유명한데 이 망양정을 관동팔경 중에 제일로 친다. 이 망양정같이 높은 곳에 세운 것은 단순히 주변경관을 높은 곳에서 바라보기만이 아니라 자연에 가까이 다가가 그 이치를 알아 하늘과 땅의 본질을 깨닫고 인간의 이치를 깨우치고자 하는 깊은 뜻이었다.

또 이런 누각이 허물어지고 퇴락하면 힘을 모아 다시세우는 이유를 여말 선초의 문신으로 이방원을 도와 왕위에 오르게 했고 왕권강화의 기틀을 마련한 하륜(1347~1410년)은 “누(樓) 하나의 망가짐과 세워짐으로 한 고을의 슬픔과 기쁨을 알 수 있고, 한 고을의 슬픔과 기쁨으로 한 시대의 도(道)의 오르내림을 알 수 있다”고 정리했다.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옛 시절 황제나 왕들은 천하절경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다. 그래서 화공을 보내 그려오게 하여 그림으로 간접 감상하는 것이다. 그 중 숙종은 동해와 인연이 많다. 직접 방문하여 망양정을 보고 얼마나 가슴이 시원했겠는가. 경복궁의 갇힌 공간에서 인현왕후와 장희빈, 그리고 후궁들 간의 피 터지는 질투의 사랑에 얼마나 괴로웠겠는가. 그리고 신하들의 물고 물리는 처절한 당파싸움에 얼마나 진절머리가 났을까. 이런 숙종이 강원도 관찰사에게 관동팔경을 그려오라 하여 보고는 이 망양정이 가장 아름답다고 하면서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친필 편액을 내렸다. 그리고 1689년(숙종 29년) 여기에 직접 와서 시 한 수를 짓는다.
 

바다를 마당삼은 옛 망양정.
바다를 마당삼은 옛 망양정.

‘뭇 봉우리 첩첩히 둘러있고/ 성난 파도 거친 물결 하늘에 닿아있네/ 이 바다 변해서 술이 된다면 어찌 한갓 삼백 잔만 기울이겠는가.’라고 흉금에 쌓인 감정을 바다에 풀어 놓았다. 호학의 군주 정조대왕(1776~1800년)은 여기에 오지는 않았지만 시 한 수를 짓는다.

‘푸른 하늘에서 해가 바다에 비치니/ 그 누가 이 망양정을 알아보겠는가./ 눈을 크게 뜨고 보니 마치 공자의 집 같이 보이고/ 종묘와 궁궐의 담장도 뚜렷하게 보이는구나.’

고려 말의 어지러운 시대에 곧은 성품으로 이재현, 이색 등과 뜻을 같이했던 정추(1333~1382년)가 이곳에 와서는 ‘망양정 위에 오래도록 서 있으니/ 늦은 봄이 가을 같아서 마음 더욱 비감해지네./…. 일만 골짜기 알천 바위가 잇달아 놓였는데/ 산을 따라 돌아가고 산을 따라 오는구나/ 큰 물결에서 구름 일어 하늘을 다 감싸고/ 바람은 놀란 물결을 보내어 언덕을 치고 돌아오네. ’비장하면서 우수 어린 감회를 쏟아낸다.

생육신으로 5세 신동이라 불리었던 매월당 김시습은 ‘십리 모래밭에서 큰 바다를 바라보니/ 바다와 하늘이 드넓고 아득한데 달빛은 푸르구나./금강산은 바로 지척인데 속세와는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구나./ 사람은 명아주 한 잎가에 떠 있구나.’라고 읊었다.

송강 정철(1536~1593년)이 1580년(선조 13년) 45세 때 강원도 관찰사로 와서 지은 유명한 ‘관동 팔경’ 가사 중 망양정을 보자. “하늘 끝을 끝내 못보고 망양정에 올라보니 바다 밖은 하늘인데 하늘 밖은 무엇인가? 가뜩이나 성난 고래(파도)를 누가 놀라게 하였기에 물을 뿜거나 하면서 어지럽게 구는가?…. 저 바다에서 솟아오르는 흰 연꽃 같은 달덩이를 어느 누가 보내셨는가? 이렇게 좋은 세상을 다른 사람 모두에게 보이고 싶구나.” 신선주를 가득 부어 손에 들고 달에게 묻는 말이 “옛날의 영웅은 어디 갔으며 신라 때 넷 신선은 누구더냐? 아무나 만나보아 영웅과 사선(四仙)에 관한 옛 소식을 묻고자 하니 사선(四仙)이 있다는 동해로 갈 길이 멀기도 하구나.”라고 가슴 벅찬 낭만을 풀어내었다.
 

옛 망양정 누에서 바라본 남쪽바다.
옛 망양정 누에서 바라본 남쪽바다.

위의 서인 정철 때문에 이곳 평해로 귀양 온 동인의 영수 아계 이산해(1539~1609년)는 ‘바다를 베개 삼아 위태로이 서있는 정자를 바라보니 눈앞이 탁 트이고/ 정자에 올라와 있으니 가슴속이 확 씻기는 것 같구나/ 긴 바람이 불고 저녁달이 떠오르니/ 황금궁궐이 옥 거을 속에 영롱하게 비치노라.’라고 지었다.

수서 박선장(1555~1616년)의 ‘망양정’ 시는 ‘가슴을 여니 아득히 삼신산은 먼데/ 눈길 닿는 저 끝까지 만경창파 펼쳐있네/평생에 바다 보이는 뜻 이루고자 하시거든/ 그대 부디 망양정에 올라보시게나‘라고 적었다. 당주 박종(1735~1793년)은 매월당 김시습(1435~1493년)과는 무슨 인연인지 300년 시차를 두고 태어난 해와 죽은 해가 똑같다. 1767년 9월 25일 33살의 박종은 경주 구경을 떠나면서 동해안 3도 27개 군을 거쳐 1천700리를 걸어서 4개월 9일 만에 경주에 도착한다. 그 과정에 망양정 기행문을 남기는데 아마 지금같이 11월초가 될 것이다.

그의 망양정 기행문은 “울진부에서 남쪽으로 40리를 가면 바닷가에 있는데 그 위에 지은 정자를 망양정이라 한다. 바다의 풍경을 보기가 청간정과 같다. 대개 바다는 천지간에 가장 호탕한 것으로서 천지도 삼킬 듯 아득히 그 끝을 알 수 없으니 정말로 천하에 더없이 좋은 경관이다. 구구한 강이나 호수의 풍경과 어찌 견주어 말할 수 있겠는가. 나는 북방 해변에서 태어나 바다를 보는 것은 하루 세 때뿐만 아니었다. 그러나 청간정 기행에서 예전에 보았던 그 고향 풍경을 잊어버렸으니 이 또한 새 것을 좋아하고 낡은 것을 싫어하는 성정에서 나온 것이다. 눈에 익은 풍경이라 하여 그 평가에서 정당성을 잃는 것은 마음의 거울이 공평하지 못함에서 기인된 것이니 이 또한 부끄러운 일이다. 정자에 숙종의 어제 시가 걸려 있다.”
 

옮겨온 지금의 망양정.
옮겨온 지금의 망양정.

처음 옮겼던 이 망양정에서 한참을 서성인 아둔한 나그네는 푸르디 푸른 넒은 바다에 세상의 근심을 던져버리고 바다에 마음을 맡겼지만 시 한 수 못 짓고 내려왔다. 파도는 쉼 없이 밀려와 바위를 때리고 하얀 포말은 허공에 사라지고 울고 있는 동해바다를 가슴으로 안고 발길을 돌렸다. 인근 바닷가 철망에는 동해의 오징어들이 가지런히 매달려 해풍을 쪼이고 있었다.

#. 관동 팔경의 유래와 두 번 옮겨온 지금의 망양정

울진 근남면의 왕피천을 따라 바닷가로 가면 그 옛날 실직국왕이 피난 왔다는 왕피천 건너 울진 엑스포공원과 케이블카가 왕피천 물위로 쉼 없이 왔다갔다를 반복한다. 왕피천 끝나는 곳에 망양정 해수욕장은 지난 여름의 뜨거웠던 잔영만 아른거린다. 망양정해수욕장에서 250m 위로 오르면 옮겨지은 망양정이 나온다. 옛 망양정 자리보다 높이 솟은 산봉우리에 옮겨지은 망양정은 옛 망양정과 비슷한 풍광을 주지만, 바닷가에 바싹 붙어 있어 긴장감을 주면서 넓은 동해바다를 온통 끌어안는 옛 망양정의 기막힌 장소만큼은 못하다.

‘바다를 바라보는 정자’라는 뜻의 망양정은 월송정과 마찬가지로 고려시대에 여기서 아래로 15km 떨어진 기성면 망양 해안가에 세웠으나 세월의 무게에 견디지 못하고 허물어진 것을 평해 군수 채신보가 1471년(성종 3년) 현종산 남쪽 기슭에 이전하였다. 1517년(중종 12년) 해풍과 비바람에 파손된 것을 1518년에 중수하였고, 1590년(선조 23년) 평해 군수 고경조가 중수했으나 허물어져 오랫동안 방치되어 왔다. 1854년(철종 5년) 울진현령 신재원이 옮길 것을 제안했으나 재정을 마련하지 못하였고, 울진현령 이희호가 군승 임학영과 1858년(철종 9년) 에 근남면 산포리 지금의 장소로 옮겼다. 여기서도 허물어진 것을 1958년 중건하였으나 퇴락하여 2005년 기존 정자를 해체하고 새로 건립한 것이 지금 있는 것이다.

관동팔경은 관동(옛 강원도 동해안지역) 지방의 수많은 경승지 중 특히 손꼽히는 경승지 8개의 명승지를 지칭하는데 평해의 월송정과 망양정(지금은 울진으로 옮겼음), 삼척 죽서루, 강릉 경포대, 양양 낙산사, 간성 영랑호, 고성 삼일포, 통천 총석정이다. 이중 통천 총석정과 고성 삼일포는 1953년 휴전선으로 현재 북한지역이고 아래 월송정과 망양정은 1962년 강원도에서 경북으로 분리되어 지금의 강원도는 남북으로 2개씩 찢어졌다. 그리고 이 망양정이 인근도 아니고 이렇게 멀리 옮겨온 것은 울진에는 관동팔경이 없어 옛 평해에 2개(월송정, 망양정) 있어 하나를 갖고 갔다고도 한다. 숙종의 ‘관동제일루’ 편액도 을진 객사에 보관했다가 잃어버렸단다.
 

단원 김홍도가 왕명으로 금강산을 그리기 위해 다녀오던 길에 그린 망양정.
단원 김홍도가 왕명으로 금강산을 그리기 위해 다녀오던 길에 그린 망양정.

정호승 시인은 “누구나 바닷가 하나씩은 자기만의 바닷가가 있는 게 좋다. 언제나 찾아 갈 수 있는….” 이라고 했다. 그렇다. 누구나 자기만의 바닷가가 필요하다.

이렇게 망망대해를 보면서 호연지기를 기르기도 하지만 저마다 바다를 대하는 관점은 다를 것이다. 필자는 탁 트인 망양정 같은 바다도 좋아하지만 이런 곳은 순간의 상쾌함은 있어도 가슴 시린 잔잔한 여운은 없다. 그래서 기암괴석에 은빛모래 소곤대는 아련한 사연이 있는 푸른 동해바닷가를 가슴에 담고 있다. /글·사진= 기행작가 이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