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천암 나한전 앞에서 바라본 풍경. 복천암은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법주사로 702-5에 위치해 있다.

속리산의 주말은 발 디딜 틈이 없다. 법주사 선원에서 동안거에 들어가셨던 스님의 부름이 없었다면 감히 차로 들어설 엄두조차 내지 못할 곳이다.

차로 옮길 짐이 있어 인파를 헤치며 들어서는 일은 쉽지 않다. 몇 번이나 검문 받듯 상황을 설명한 후에야 비상등을 켜고 나아갈 수 있었다. 법주사에 대한 기대감보다 특혜를 누리는 듯한 불편함이 무겁게 가슴을 누른다.

법주사 뒤편에 자리한 선원에는 인적조차 없어 몸과 마음이 조심스럽다. 동안거가 끝났지만 여전히 선원을 지키며 수행하는 스님들이 계셔 외부인은 함부로 들어갈 수가 없다. 먼 길 온 내게 법주사 공양을 대접하겠다는 스님의 말씀에서 가을 향기가 난다. 스님은 법주사에 처음 온 나를 배려해 지름길을 두고 천왕문 쪽으로 이끄신다.

샛노랗게 물이 든 은행잎들의 황홀한 잔치판에 시린 눈을 뜰 수가 없는데 스님의 걸음은 무심하게도 빠르다. 카메라에 법주사의 가을을 마음껏 담고 싶다. 모처럼 서 보는 거대한 사천왕상 앞에서 잠시 세속의 때를 씻어내고 싶다. 국보급 문화재들도 둘러보고 싶은데 스님의 걸음은 흐트러짐이 없다.

사진으로만 보던 팔상전을 몇 번이나 힐끔거리며 인파 속으로 사라져가는 스님을 놓칠 세라 종종걸음을 쳐야 했다. 공양간에는 사찰 일을 돕거나 스님을 친견하러 온 방문객들이 공양 중이다. 푸짐하고 정성들인 공양 앞에서 잊고 지내던 공양의 기도가 나를 위로 한다.

보리수나무 두 그루가 지키는 대웅보전의 고색창연한 위엄 앞에서 잠시 숨 돌릴 여유를 찾는다. 중층으로 이루어진 법당 안에는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좌우로 석가모니불과 노사나불이 봉안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는 삼존좌불, 그 인자하고 근엄한 눈빛이 나를 내려다보신다. 나는 무엇을 위해 스님의 부름을 받고 이곳까지 한걸음에 달려 왔는가. 화두처럼 와서 박힌다.

인파에서 벗어나 고즈넉한 암자를 보고 싶다고 하자 스님이 산내 암자 중 가장 깊은 역사를 지닌 복천암을 소개해 주신다. 단풍과 등산객들로 활기가 넘치는 잘 닦여진 시멘트길이 우리를 안내한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길은 보이지 않는다. 거대한 출렁거림을 따라 사람들은 걷고 있다. 인적 없는 시간 이 길을 오르면 내가 가야할 길이 보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붐비는 세심정을 지나고 이 뭣고 다리 건너편 산비탈에 복천암이 보인다. 문장대로 향하는 거친 숨소리는 멀어져 가고,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느티나무 서너 그루가 처연한 자태로 복천암의 깊은 역사를 말해 준다. 이곳은 법주사의 암자로 신라 선덕여왕 때인 720년에 창건된 사찰이다.

고려 공민왕이 극락보전에 무량수라는 편액을 친필로 썼으며, 세조는 이곳에서 신미 대사와 함께 3일 동안 기도드리고 목욕소에서 목욕을 하여 피부병이 낫자 절을 중수하도록 이르고 ‘만년보력(萬年寶曆)’이라 쓴 사각옥판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신미대사에게 왕사이자 혜각존자라는 호를 내리고 존경심을 표한 세조, 몸의 병뿐만 아니라 마음의 병까지 치유되었을 세조의 아름다운 인연을 복천암은 간직하고 있다.

이곳은 속리산의 배꼽에 해당하는 명당자리다. ‘나랏말싸미’ 영화를 접한 적이 없는 내게 산중에 계시는 스님이 영화에 비친 신미대사 이야기를 풀어내신다. 수행뿐만 아니라 빠르게 변화하는 세계정세까지 두루 관심의 끈을 놓지 않는 스님은 30년이 넘는 세월을 오로지 선방에서 수행만 하셨지만 어느 부분도 막힘이 없다.

복천암은 여느 암자와는 달리 선원 뒤로 극락보전과 산신각이 숨어 있듯 앉아 있다. 절 이름과 관련 있는 복천수가 흐르는 바위 옆에 극락보전이 있다. 궁궐의 많은 어의들이 고치지 못한 세조의 병을 고친 복천암, 그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가을경치에 밀려 아미타삼존불이 쓸쓸히 법당을 지키고 있다.

일반인에게는 출입이 금지된 나한전 쪽을 스님이 안내해 주신다. 산신각을 지나 모퉁이를 돌자 조실 스님이 머무는 요사채와 나한전이 후원처럼 아늑하다. 기와를 얹은 작은 문 안으로 숨이 멎을 것 같은 오랜 기다림 하나, 남들이 드나들지 않는 문을 통해 나를 기다리는 부처님이 보인다.

조낭희 수필가
조낭희 수필가

조용히 합장한 채 문턱을 넘지 못하는 나와 달리 스님은 벌써 긴 계단을 올라 나한전 문 앞에서 예를 갖추신다. 홀로 돌아앉은 이 쓸쓸한 고립의 풍경이 주는 울림은 크다. 가슴이 먹먹하다. 나한전 뜰 앞에 앉아 하나의 계절로 나투시는 부처님을 오래도록 뵙고 싶은데 스님은 아무 말씀도 없이 사라지셨다. 눈물이 날 것 같은 경이로운 만남, 그 여운은 길 것이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후원을 빠져 나오는데 뜰 위에 놓인 조실 스님의 털신 한 켤레가 마음을 붙든다. 외롭고 고독한 수행, 거기 범접할 수 없는 아름다운 세계 하나 머문다. 화두가 풀린다. 하마터면 드러나는 현상에 취해서 이 가을을 송두리째 놓칠 뻔했다. 올 가을은 유난히 갈증이 심했다.

나태해지거나 흔들릴 때마다 다양한 모습으로 나를 지켜 주시는 부처님, 비로소 스님의 부름 속에 깃든 참뜻을 알아차린다. 무시로 나를 성장시키는 소중한 인연들, 무심히 걸어가는 스님의 뒷모습이 가을보다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