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정돈된 자천교회.

어릴 적 예배당은 최고의 놀이터였다. 동네에서 가장 신식 건물이었고 피아노는 구경도 못 해본 우리에게 오르간을 쳐 볼 수 있는 곳이었다. 문이 항상 열려있어서 방과 후에 들러 언니들에게서 배운 젓가락 행진곡의 앞부분을 눌러보곤 했다. 심지어 교육관에 탁구대가 펼쳐져 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도시에서 이사 오신 목사님은 내 또래의 딸이 있어서 뒤로 둘러맨 가방이나 정갈하게 깎은 연필이 가지런히 들어간 자석필통은 우리의 부러움을 샀다.

밤하늘의 별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영천 보현산 천문대의 자락에는 그 시절 예배당보다 더 오래된 교회가 있다. 한옥으로 지은 자천교회이다. 내가 다닌 예배당은 오른쪽은 남자들이 왼쪽은 여자들이 앉았다. 어른들이 그렇게 나눠 앉았기에 이름표가 없어도 그렇게 앉는 게 당연한 줄 알았다. 자천교회는 중간에 가림막이 있어서 서로 보이지 않는 상태로 예배를 드린다. 하지만 앞에 선 목사님 자리에서 보면 가림막이 느껴지지 않고 양쪽의 성도들이 다 보이니 건물을 지은 사람의 지혜가 돋보이는 설계이다. 뒤쪽에 온돌방이 있어서 아기와 함께 온 사람이나 의자가 불편하고 연세가 많으신 분들을 따뜻하게 해 준다.

암울한 시기였던 1904년, 영천에 희망을 만들어 낸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권헌중 훈장이다. 경북 경주에서 서당 훈장을 하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나자 일제의 만행에 분노를 참지 못하고, 일본에 항거하였으며, 이 일로 인하여 일경의 눈을 피해 경주를 벗어나 청송으로 피신하기에 이른다. 이후 1898년 대구로 내려가기 위해 노귀재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던 중 외국인 선교사 제임스 아담스를 만난다.

그는 대구로 내려가지 않고 이곳 영천에서 초가를 구매한 뒤 정착했다. 초가를 서당 겸 예배당으로 활용하며 지내던 중 교인이 점차 늘어남에 따라 예배당을 신축하기로 계획한다. 그래서 건축된 것이 1904년에 지어진 16칸 한옥교회 자천교회이다. 그러나 예배당 건축이 쉬운 것만 아니었다. 유교 사회인 이곳에서 반대가 심하게 일어나 교회건축은 중단되었고 이에 권헌중은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지어주기로 하고 예배당 건축에 대한 동의를 받아낸다.

김순희수필가
김순희
수필가

영천의 한옥 기술자는 아이디어를 내어 2면 8간의 한옥 2채를 붙이는 방식으로 예배당을 건축한다. 그래서 이 건물은 좌우가 서로 거울에 반사된 모습을 하게 됐다. 건물 4면 모두 지붕을 가지고 있으며 높아진 지붕의 무게를 감당하기 위하여 실내에는 4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다.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나 있어 쳐다보노라면 아늑함이 할머니네 아랫목과 같다. 1913년 권헌중 장로는 근대식 교육기관인 신성학원을 설립한다. 지금은 자천교회의 교육관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한옥교회와 한옥 교육관이 있는 곳은 이곳 영천뿐이라고 한다. 신성 학교는 요즘 처치스테이(Church Stay)의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잔디가 깔린 마당은 야외결혼식장으로도 활용할 것이라 한다.

자천교회 예배당의 일화가 하나 있는데, 6·25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영천에 주둔한 북한군에게 폭격을 시도할 때 성도들이 지붕에 올라가 ‘CHURCH’ 라는 글을 새겨 예배당은 폭격을 피했다고 한다. 예배당 온돌방 옆에 있는 굴뚝이 나지막한 것은 굴뚝에서 나는 밥 짓는 연기에 마음 아파할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배려라고 한다.

학당 건물 벽에는 태극기가 걸렸는데 실제로 3·1 운동 때 사용한 것이라 한다. 그 옆에 교회 설립에 참여한 분들의 부조가 있는데 동산병원 정형외과 의사 선생님이 만들어 기증했다고 한다. 태극기 옆에 십자가가 섰다. 휘어진 나무로 된 모습이 십자가에 예수님의 형상이 없는데도 그 모양 자체가 구부러진 게 예수님의 모습 같아 마음이 아릿하다. 한옥교회에서 풍기는 온화함과 참 잘 어울리는 십자가이다. 그 십자가 앞에서, 댓돌 위에 신발을 벗어 두고 함께 들어가 남녀가 따로 앉아 드리는 예배. 100년을 간직한 전통을 1천년이 지나도록 볼 수 있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