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학생들을 대면으로 만나지 못하다 보니 선생 역할 제대로 못한다는 느낌이 부쩍 강해졌다. 지난 번에는 학년별 학생들도 만나고 동아리 관계 있는 학생들도 만났는데, 다행스럽다, 아직 학생들 살아 있구나 하는 느낌이 좋았다.

내친 김에 오랫동안 방치해 두다시피 한 유학생들을 만나보기로 했다. 먼저 중국에서 온 대학원생들 만나고 다음에는 다른 지역에서 온 학생들도 만날 계획이다.

코로나19 때문에 방학 중 건너갔다 돌아오는데 어려움 겪은 학생들이 많았고, 어떤 학생들은 고향에 돌아가 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나는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무사한 게 다행스럽다. 한국이 낯설지만 견딜만 하기 바라고, BTS 같은 일들로 마음에 부담을 짊어지지 않기 바란다. 어디들 공부는 어떻게들 하시나? 하면 일제시대 여성 작가 이선희를 어렵게 쓰는 학생도 있고, ‘겨울여자’, ‘아메리카’의 작가 조해일을 읽은 학생도 있다. 강석경을 죄다 읽고 분석한 논문을 쓴 후 박사과정에서 이번에는 박경리에 도전장을 내민 학생, 아직 공부 주제를 잡기에는 학기가 안 찬 학생, 중국의 지도교수가 내 학생이었기도 한, 2대째 내게 지도를 받는 학생도 있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 나의 얘기는 어느새 1996년 가을 혼자 인천에서 배를 타고 엔진으로 건너가던 과거의 일로 들어간다. 그때 나는 인생이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을 것 같다고 느낄 만큼 괴로웠고 어떻게든 한국어가 들리지 않는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미리 비자를 받아두지 않고도 당장 외국으로 떠날 수 있는 방법은 그때 서울 신사동에 있던 진천 페리호 사무실에서 배의 티켓을 사는 길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중국은 나의 첫 외국여행지였다. 엔진에서 베이징으로 들어간 다음다음날 천안문 앞 맥도날드 체인점에 들어가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외국인들에 둘러싸인, 한국어가 하나도 들리지 않는 자유를 맛보았다.

맥도날드에서 나오니 날은 어느새 어둑어둑해졌다. 그냥 하릴없이 거리를 걷는데 바로 라오사 차점이라는 상호가 보였다. 중국 작가 ‘노사’를 기념하는 찻집, 차만 팔지는 않고 다른 음식도 팔고 전통 민속 공연 프로그램도 펼치는 곳. 당시 돈 50위안을 내고 홀 맨 뒷자리 테이블에 앉아 사람들 머리 사이로 중국 노래와 연기와 묘기를 보는데, 낯선 타향에서 홀로 만끽하는 외로움은 그후에 어디에서도 비할 바가 없었다. 우리 중국 유학생들도 한 사람 한 사람 외롭고 어렵지 않은 학생들이 없으리라.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조그만 공부거리라도 가지고 얼굴 한 번 더 보는 일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코로나는 아직 가시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래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 <한국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