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문화와 상징의 공간
(14) 호미곶

등대박물관 일대

움베르트 에코는 문학 강의에서 상징은 텍스트에 의해 창출되는 의미 효과가 크며, 그렇다면 어떤 이미지나 단어, 대상이라도 상징 가치를 띨 수 있다고 했다. 호미곶은 원래 모양새가 말갈기를 닮았다고 해서 장기곶(長<9B10>串)으로 불리다가 2001년 12월 이름을 바꾸었다. 한반도 최동단의 이곳 지명이 호미곶으로 바뀌면서 한반도의 상징은 완성되었다. 조선 시대 풍수지리학의 대가였던 격암(格庵) 남사고는 한반도 모양새를 호랑이가 앞발로 연해주를 할퀴는 형상이라 했다. 백두산은 호랑이의 코, 호미곶은 호랑이의 꼬리에 비유하며 이곳을 천하의 명당이라 꼽았다. 일제는 한일 병탄 이후 한일 모든 교과서에 한반도는 토끼 모양이라고 실었는데, 최남선은 이에 반발해 ‘소년’ 창간호에 호랑이 지도를 발표했다. 이후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만주 벌판을 향해 포효하는 ‘근역강산맹호기상도’가 잇달아 그려졌으니 이제야 호미곶이 제 이름을 찾은 듯하다. 최남선은 호미곶의 일출을 조선 십경 중 하나로 꼽았다. 호미곶은 계절에 따라 한반도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뜨는 곳이다. 이렇듯 호미곶은 호랑이의 기운을 품은 태양과 바람의 땅이다. 이 풍광의 땅은 거칠면서도 아름답다. 파도는 해안가 인근에 유난히 많은 암초에 걸려 햇빛과 함께 부서지고, 그 거친 소리는 하루 종일 바람을 타고 호미반도에 맴돈다. 이 바람과 태양은 이 땅에 보리와 유채꽃, 그리고 말들을 키웠다.

 

한반도서 가장 일찍 해가 뜨는 곳… 말갈기 닮음새로 장기곶으로 불리다 2001년 12월 이름 바꿔

조선 풍수지리학 대가 남사고 ‘호랑이 꼬리’에 비유 천하명당 꼽아… 일출은 ‘조선십경’ 중 하나

1908년 건립된 호미곶 등대·국내 유일 국립등대박물관·평화의 상징 상생의 손 등 볼거리 풍부

대보·구만리 일대 10만여 평 청보리밭·유채꽃밭 장관… 연오랑세오녀 테마공원도 만들어져

 

호미곶 상생의 손
호미곶 상생의 손

□호미곶광장 중심으로 등대, 박물관, 상생의 손 모여 있어

호미곶으로 가는 길은 구룡포에서 2011년 새로 확장된 929번 지방도로를 타면 금방이다. 그러나 여유가 있다면 구룡포에서 강사리, 대보리를 지나 호미곶에 이르는 해안도로를 권한다. 이 도로를 지나면 옛길의 정취와 고즈넉한 어촌의 풍경, 끝없이 펼쳐지는 바다 위 반짝이는 윤슬을 즐기며 운전하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여정 중간에 펼쳐지는 주상절리 감상이나 조용하고 아담한 해변의 정취는 덤이다. 때를 잘 맞추면 대보리와 구만리 일대에 펼쳐지는 유채꽃과 청보리밭의 향연을 감상할 수도 있다.

호미곶의 심장은 단연 해맞이광장이다. 이곳을 중심으로 호미곶 등대, 국립등대 박물관, 상생의 손이 있다. 국립해양조사원의 ‘동해안항로지’에 따르면 호미곶 부근에는 암초가 산재돼 있어 해안선에서 2㎞를 벗어나 통항하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돼 있다. 실제로 해안 주변에는 수심 3m 내외의 암초가 곳곳에 산재해 있다. 1907년 9월 일본 수산실업전문대학 실습선이 좌초돼 승선자 4명이 사망했다. 일제는 이 사건의 책임을 우리나라에 돌리며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억지를 부렸는데, 이 일을 계기로 1908년 호미곶 등대가 건립되었다. 호미곶 등대는 1900년 초반에 건설된 많은 등대 중에서 단연 압권이다. 자료나 증언마다 다소 차이가 있지만, 프랑스인이 설계하고, 중국인 기술자가 시공을 맡았다는 게 정설이다. 등대는 높이 26.4m, 6층짜리 팔각형 건물로 서구식 건축양식을 보여주는데 철근을 사용하지 않고 오롯이 벽돌로만 쌓아 올린 후 석회 몰타르로 마무리했다.
 

호미곶 등대
호미곶 등대

□ 견고성과 건축미 자랑하는 호미곶등대

등대에 올라서면 초속 10m의 바람에도 1㎝ 이상 흔들리는데, 지금까지 보수나 증축 없이 100년 이상의 풍파를 견뎠으니 그 견고성은 물론이고, 건축미학적인 가치도 뛰어나다. 벽돌만으로 그 높이까지 축조한 터라 하부의 안정성을 위해 아래는 펑퍼짐할 정도로 넓고 위로 올라갈수록 차츰 좁게 만들었다. 이렇게 수직선상의 곧고 우람한 기상을 살리면서도 안정감을 살린 건축미는 오늘날에도 결코 쉽지 않다고 한다. 출입문과 창문은 고대 그리스 신전 건축의 박공 양식으로 장식되었고, 여기에 정교한 사각형의 페디먼트를 각인해 르네상스풍의 품격을 살렸다. 층계는 모두 108개인데 주물로 만들어져 그 시대의 고전적 투박함이 드러나며, 바닥의 나뭇결도 세월을 이기고 그대로 살아있다.

등대의 꼭대기, 등명기를 관리하는 일은 숭고한 작업이다. 적막한 밤바다를 향해 빛을 내보내는 일은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 그러니 층계를 오를 때마다 번뇌를 모두 잊고 숭고한 사명감만 가지라는 설계자나 시공자의 의도였을까? 등탑의 각 층마다 조선왕실의 상징인 배꽃 문양이 각인돼 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당국은 배꽃을 철판으로 가리고 자신들의 문양인 국화를 새겨 넣었다. 해방 후 철판을 떼어내자, 그동안 숨죽이며 있던 배꽃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풍전등화의 앞날에도 주권의 위엄을 지키고자 했을 대한제국 왕실의 의지가 가슴 아프다. 2006년, 98여 년 동안 등명기를 비바람으로부터 지켜온 등롱만 교체한 후 지금까지 1908년 12월 20일 최초로 불을 밝힌 그때 그대로이다. 국내에서는 12번째로 100년을 넘게 불을 밝혀 온 등대인 것이다. 등대에 사용되는 전구는 700와트 하나로 가로등보다 조금 밝은 정도로 12초마다 깜빡이는데, 손으로 깎아 만든 렌즈는 이 빛을 40여 ㎞까지 뿌려준다. 호미곶 등대는 1982년 경상북도 지방기념물 제39호로 지정되었다.
 

호미곶 청보리밭
호미곶 청보리밭

□ 대보리, 구만리는 유채꽃, 청보리밭의 향연장

등대 바로 옆에는 국내 유일의 국립등대박물관이 있다. 박물관은 유물관, 등대역사관, 체험관 등으로 나뉘는데, 세계 주요 등대뿐 아니라 등대의 역사, 건축 등 등대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망라하고 있다. 특히 유물관에는 등대의 눈이라고 할 수 있는 각종 등명기와 등명기 렌즈가 전시돼 있어 빛의 발생과 작동방식을 이해할 수 있다.

등대박물관을 나와 해맞이광장으로 나오면 거대한 두 손을 볼 수 있다. 오른손은 바다에, 왼손은 광장에 제작돼 서로 마주보고 있다. 전쟁과 갈등으로 얼룩진 지난 천년은 한 손의 시대였다. 이 시대를 청산하고 평화와 희망으로 화해하고 서로 상생하는 새천년은 두 손의 시대이다. 그래서 이 손은 상생의 손으로 불린다. 일설에 따르면 갑신정변을 주도한 김옥균은 정변 10년 후에 홍종우에게 살해당한다. 김옥균의 시신은 부관참시당해 머리는 마포의 양화진나루에 걸렸고, 사지는 찢겨져 조선 팔도로 보내졌는데, 그중 왼팔은 호미곶 바다에 던져졌다고 한다.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우리에게 좀 더 인내가 필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일본의 세력을 등에 업긴 했지만, 완전한 자주독립과 개혁을 시도했던 그의 행동이 당시 봉건세력들과 상생을 도모했다면 우리의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진보와 보수, 대기업과 협력 중소기업들, 이웃과 이웃, 무엇에라도 대립하고 있는 우리 모두가 이 상생의 손을 되새긴다면 우리는 분명 한결 나아진 자신이 될 것이다.

바다를 정면으로 광장의 왼쪽에는 전국 최대의 가마솥이 있다. 둘레가 무려 10.3m에 깊이가 1.3m나 되는 이 솥으로 한 번에 2만 명분의 떡국을 끓일 수 있다. 2004년 1월 1일을 시작으로 매년 새해마다 관광객들은 이곳에서 일출을 보며, 떡국을 맛볼 수 있다. 광장의 오른쪽에는 연오랑 세오녀의 동상이 있는데, 연오랑 세오녀 이야기는 한반도 유일의 태양 숭배 설화이다. 호미곶에서 포항으로 빠져나가기 전인 동해면 임곡리에 연오랑 세오녀 테마공원이 조성돼 있다.

호미곶 광장 주변, 대보리와 구만리 일대는 유채꽃과 청보리밭의 향연장이다. 10만여 평에 11월과 12월께에 파종해 4~5월에 개화하는 유채꽃과 청보리는 때를 잘 맞추어 온다면 빛의 향연을 감상할 수 있다. 하늘의 푸른색이 유채꽃, 청보리의 노랑, 녹색물결과 바다에서 맞닿은 풍경은 우리가 도저히 그릴 수 없는 한 폭의 그림이다. 호미곶의 보리는 겨울을 이기고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세찬 바람을 맞으며 자란다. 동네 처녀들이 쌀 한 말을 다 못 먹고 시집간다고 했을 정도로 이 일대는 보리밭 지천이었다.

 

호미곶 일출
호미곶 일출

□ 한흑구의 ‘보리’를 떠올리게 하는 곳

청보리밭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흑구(黑鷗) 한세광이 떠오른다. “너는 차가운 땅 속에서 온 겨울을 자라왔다.”로 시작되는 수필 ‘보리’처럼 한흑구는 일제 암흑기에 태어나 젊어서는 문학과 독립운동을, 해방 후에는 3년간 서울에서 살다가 포항으로 와 평생을 보냈다. 일제강점기에 시, 수필, 소설 등을 왕성하게 창작하였을 뿐 아니라, 미국문학을 번역해 소개하기도 했다.

안준우 소설가. 2011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악어의 눈물을 위하여’가 당선돼 등단. 단편 ‘헤밍웨이’ 등 발표.<br>
안준우 소설가. 2011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악어의 눈물을 위하여’가 당선돼 등단. 단편 ‘헤밍웨이’ 등 발표.

한흑구는 일제의 서슬 퍼런 억압에서도 이육사 등과 함께 단 한 줄의 친일 문학을 쓰지 않았다. 한흑구가 호미곶 보리밭 일대에서 작품 구상을 한 것은 호랑이의 기운이 그의 강건한 기개와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필자만의 억측일까.

호랑이는 돌진할 때 꼬리로 몸의 균형과 속도를 조절하며, 무리를 지휘하는 신호를 보내기도 한다. 만주벌판을 향해 포효하는 호랑이 기개의 시작이 백두산이라면 그 끝은 호미곶이다.

사시사철 동해로부터 거센 바닷바람이 불어오고, 한반도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뜨는 곳이다. 이 땅의 기운이 강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조선시대 군마들이 이 강한 기운의 땅을 박차고 거센 바람을 가르며 달렸던 곳이다.

일반 말들은 이 강한 기운을 이기며 자라지도 못했을 것이다. 온 국민의 상생을 염원하는 두 손이 마주보고 있는 곳, 단 한 줄의 친일 문학을 쓰지 않았던 문학가가 사색하며 고뇌했던 곳, 호미곶은 한반도의 최동단으로 가장 역동적이면서도 상징적인 곳이다.

<사진/안성용>

글/안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