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울진 평해 황씨 종택과 해월헌 종택

평해 황씨 해월헌 종택.

울진 하면 반공의 세대에게는 끔찍한 울진삼척무장공비 “공산당은 싫어요” 이승복 어린이(조선일보의 각색)가 생각나고 관동팔경의 월송정과 망양정 그리고 성류굴과 불영사 후포해수욕장 등등이 떠오를 것이다. 그리고 강원도인지 경북인지 헷갈리는 것은 예전엔 강원도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그 지역의 이름 따라 성씨의 본관을 따르는데 울진의 평해를 본관으로 하는 평해 황씨가 있다. 그리고 해월헌 건물을 종택으로 옮겨놓았다.

#. 우리나라 성씨의 유래

사람은 처음에는 자기를 낳은 어머니만 확실히 알고 아버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모계혈연을 중심으로 모여 사는 모계사회가 나타났다가 뒤에 부계사회로 전환되지만, 모계, 부계 할 것 없이 원시사회는 조상이 같은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고 모여 살았다. 이와 같이 인류사회는 혈연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원시시대부터 씨족에 대한 관념이 매우 강하였다. 자기 조상을 숭배하고 동족끼리 서로 사랑하고 씨족의 명예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리고 각 씨족들은 다른 씨족과 구별하기 위하여 각기 명칭이 있었을 것이다. 그 명칭은 문자를 사용한 뒤에는 성으로 표현하였다. 동양에 있어서 처음으로 성을 사용한 것은 한자를 발명한 중국이었으며 처음에는 그들이 거주하는 지명이나 산, 강 등의 이름으로 성을 삼았다.

중국도 하(夏)은(殷)주(周)시대 이전에는 남자는 씨를, 여자는 성을 호칭하였다가 후대에 성씨가 합쳐졌던 것이며 씨는 신분의 귀천을 구별하였기 때문에 귀한 자는 씨가 있으나 천한 자는 이름만 있고 씨는 없었다.
 

옮겨지은 해월헌.
옮겨지은 해월헌.

중국의 성씨제도를 수용한 우리나라는 고려 초기부터 지배층에게 성이 보급되면서 성은 부계혈통을 표시하고 명은 개인의 이름을 가리키게 되었다. 한국의 성씨는 가족 전체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부계의 혈통만을 표시하며 본관과 성을 결합해 혈족의 계통을 나타낸다. 본관은 성씨가 시작된 시조의 관향 명칭이며 그 지역명인 본관을 성과 함께 써서 혈족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 안에서 다시 중시조에 따라 다양한 종파를 구분한다.

그 결과 성은 그 사람의 혈연관계를 분류하는 기준이 되며 이름은 그 성과 결합하여 사회성원으로서의 개인을 남과 구별하는 구실을 한다. 이름 자체만으로는 독립된 인격행위를 할 수 없으며 어디까지나 성을 보조하는 기능을 가진다.

성은 그 사람이 태어난 부계혈통으로 신분이나 호적에 변동이 생긴다 하더라도 혈통이 변하는 것이 아니므로 일생동안 아니 죽어서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우리나라 관습법이다.

우리나라 성씨의 특징은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그것을 수용 보급하는 과정에서 성씨체계가 특이하고 고유한 점이 많다. 우리나라 성은 가족 전체를 대표하는 공동의 호칭이 아니라 부계위주의 그 자체의 칭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이 변동되더라도 성은 변하지 않아 호주와 다른 성의 어머니 며느리가 한 가족인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한 가정의 성은 같기 때문에 남편과 아내의 성씨가 같은 부부동성주의가 원칙인 외국인들은 개가하면 또 성이 바뀌기에 우리를 이상하게 본다. 이웃 일본도 일가일씨주의(一家一氏主義)다. 세상은 넓고 다양하여 아직도 지배층만 성이 있고 이름만 있고 성이 없는 나라도 많다. 천민들도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폐지되고, 오늘처럼 누구나 본관(本貫)과 성(姓)을 갖게 된 것은 처음으로 민적법을 시행한 1903년(융희 3년) 이후 1909년부터이다. 당시 성이 없던 사람이 가졌던 사람의 1.3배나 되었다.

그리하여 귀화인을 제외한 우리나라는 2003년 기준 286성이고, 중국은 6천931여개, 일본은 12만3천여 개나 된다. 인구는 김씨(21.6)가 가장 많으며 이, 박, 최, 정씨의 5대 성이 인구의 50%이상을 차지한다.
 

황씨  시조 황락 유허비.
황씨 시조 황락 유허비.

#.평해 황씨 종택

여행과 답사를 떠날 때 식당을 예약하는 사람은 이과 형이고 필자같이 문과형의 자유로운 영혼은 단체를 제외하고 식당을 예약하지 않는다. 어느 정도의 답사 일정은 있어도 어디로 튈지 어디에 머물지 돌출 상황 때문에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식당을 고른다. 주로 돈 주고 광고한 인터넷의 맛 집은 절대 찾지 않는다. 더구나 줄서서 번호표 받아 대기하는 것은 자존심의 문제라 하지 않는다. 잘 모를 때는 기사식당 가면 후회는 하지 않는다. 현지 택시기사들은 매일 사먹기 때문에 입맛이 까다롭기 때문이다. 오늘도 영덕 강구 못미처 순간의 감을 잡고 들어갔다. 사람 하나 없고 주인 아주머니는 김치 담는다. 갈 길이 바빠도 매일 매일 김치 담는다는 주인 아주머니의 정성에 푸른 동해바다를 바라보며 기다리는데 사람들이 줄줄이 온다. 이상하게 필자가 식당에 들어가면 손님이 없다가도 사람들이 들어왔다. 맛있게 잘 먹고 나왔다.

평해 황씨 종택 입구에 들어서니 황씨 시조 황락의 유허비가 서있고 ‘관동팔경월송정’의 큰 문이 소나무와 어울리게 서 있다. 종택 입구 담벼락 앞에는 애국지사 국오 황만영 선생 기념비가 종택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여러 황씨 중 평해 황씨를 종장으로 삼는 이유는 시조 황락이 중국 한나라 때 구대림(평해구씨 시조) 장군과 베트남(옛 교지국)에 사신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울진군 기성(지금의 평해) 월송정 근처에 표류하고 정착하여 황시 시조가 되기 때문이다.

처음엔 지명 따라 기성 황씨의 시조가 되고, 기성이 평해로 바뀌면서 평해 황씨로 굳혀졌다. 평해 황씨는 우리나라 황씨의 종가로 시조 황락의 첫째아들 기성군으로 봉해진 황갑고의 후손들이다. 황갑고의 후손 중에 금오장군 태자검교 황온인을 시조로 한다. 황씨는 창원황씨 상주 황씨 우주 황씨 등등의 여러 황씨들이 있는데 조선의 명기 황진이(黃眞伊)는 우주 황씨 황 진사의 서녀(庶女)이다.

입구에 들어서자 황씨 여러 문중에서 시조제단 참배기념비와 황씨 문중에 한자리한 분들의 비가 맨 앞에 선명히 서 있다. 봉사재 종택 건물은 오래되지 않았고 제단과 여러 건물과 정자 등도 새것으로 잘 가꾸어 놓았지만 주위를 감싸고 있는 소나무군락이 장쾌한 맛을 풍긴다. 역시 소나무는 언제 보아도 아름다움이 흐른다.

 

해월헌 종택 담장과 장독대.
해월헌 종택 담장과 장독대.

#. 평해 황씨 해월헌 종택

월송정과 푸른 동해바다와 백사장을 보고 다시 나와 평해 황씨 해월 종택으로 향했다. 황씨 종택서 옛 국도 타고 불과 100m 쯤 지나 길 아래 전병모. 전술모 형제 효자비에 갔다. 정선 전씨 전종복의 둘째, 넷째아들로 평소에도 부모님을 예를 갖추어 봉양하다가 아버지가 큰 종기로 위중해지자 입으로 고름을 빨아내고, 변의 맛으로 병세를 판단하여 약을 쓰고, 꿩고기를 구하여 원기를 회복시키고자 하였고, 아버지 병환을 자신이 대신해 달라고 하늘이 빌었단다. 병세가 위독하자 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시게 하고 부모님이 죽은 뒤에는 여막을 치고 정성을 다하여 묘를 지켰다 한다. 그래서 지역의 선비들이 건의하여 조정에서 1894년(고종31년) 형제에게 정려하였고 통정대부도정을 추증하였다. 이후 1913년 후손들이 효자비를 세웠다. 병원이 곳곳에 있는 지금 시대로는 이해기 힘들지만 그 당시는 그렇게 하지 않고는 다른 방법이 없어 지극한 효심으로 최선을 다한 효자였다. 초라한 정려각 뒤로 소나무 몇 그루가 효자의 정성을 위로해주고 있는 듯했다.

기성면 사동마을 평해 황씨 해월헌 종택에 갔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종택 전체를 수리 중이었다. 고택 감상하고 좋은 사진 찍기는 어려웠다. 마을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끝 산자락을 고스란히 안고 있었다. 소나무가 산에서 감싸는 비슷한 지형이라 순간 안동의 간재 종택의 축소판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종택의 주인공 해월 황여일(1556~1622)은 어려서부터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고,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임진왜란 때는 도원수 권율의 종사관으로 공을 세운 문무를 겸비한 분이었다.

어수선한 종택을 살펴보고 종택을 감싸고 있는 경사진 산언덕에서 내려다보았다. 역시 전체를 조망하는 데는 위에서 아래로 보는 부감법이 백미다. 빽빽이 둘러진 소나무의 위용은 강한 힘과 기상이 꿈틀대는 것 같다. 울진이 어떤 지역인가. 우리나라 최고의 질 좋은 금강송 군락지가 아닌가. 경사가 급한 산의 소나무는 꼿꼿이 힘 있게 종택을 호위하고 있었다. 마당에서는 포클레인이 기중기에 흙을 담아 지붕에 올려주면 와공은 받아서 흙을 깔고 기와를 이고 있었다. 아래서 흙뭉치를 둥글게 만들어 지붕에 던지면 받아서 기와 이던 장면은 단원 김홍도의 그림에서나 가능하다.
 

해월헌 종택 우리시대 지붕 공사.
해월헌 종택 우리시대 지붕 공사.

필자가 1997년 수오재를 옮겨지을 때 흙을 지게에 지고 지붕에 올랐고, 지금은 한옥 짓는 모든 집에 장비로 흙을 지붕에 올린다. 이곳 종택으로 옮겨온 해월헌 고택은 해월 황여일이 33살(1588년)때 뒷산 중턱에 지어 바다를 바라보았고, 63세(1618년)에 동래부사를 마치고 낙향해서는 ‘나이 들어 왔다’는 의미의 만귀헌(晩歸軒)으로 고쳐달았다. 19세기 중엽 후손들이 지금의 자리로 옮겨짓고 다시 호를 해월헌으로 환원했고 글씨는 선조 때 영의정 했던 아계 이산해(1539~1609)가 평해로 귀양 와서 쓴 글씨다.

이산해는 북인의 영수로 목은 이색의 후손으로 토함 이지함의 조카인데 그가 쓴 해월헌기에는 “군자의 마음은 바로 광대하고 고명하여 길이 변치 않는 바다와 달인 것이다. 지금 그대가 이로써 헌(軒)의 이름을 삼았으니 마음을 보존하는 도리를 얻음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시속 가운데서도 변치 않는 것인가.”

옛 선비들의 문장은 지금의 문장가와 격이 다르다. 집 앞에 초가집은 애국지사 황만영의 생가를 복원해 놓았다. 마을을 빠져나오다 시골집 감나무의 감이 푸른 하늘의 기운과 맑은 가을 햇살에 알몸인양 붉히고 있었다.

/글·사진=기행작가 이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