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손경찬의 대구·경북 人 피아노 조율사 박상효 씨

어떤 분야건 최고가 되기 위해선 먼저 자기가 하는 일을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박상효 씨.

조율을 마친 스타인웨이가 우아한 모습으로 연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연주를 듣기 위해서 찾아가던 문예예술회관 팔공홀의 무대에 올라서고 보니 그 장엄하면서도 고즈넉한 적요에 위압감을 느꼈다. 비어 있는 객석을 보며 피아노가 어떤 소리로 홀을 가득 채울지 상상했다.

조율사 박상효 씨가 그랜드 피아노의 뚜껑을 열었다. 기다란 버팀봉으로 뚜껑을 고정시키자 갈비뼈처럼 질서정연한 프레임과 아우터 링의 모습이 훤히 드러났다. 연주용 피아노의 속살을 그렇게 가까이에서 들여다본 건 처음이었다. 저기서 모차르트와 베토벤, 차이코프스키, 라흐마니노프, 쇼팽 녹턴의 선율이 쏟아진다고 생각하니 피아노를 함부로 만지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대입 실패 후 오르간 만드는 곳서 근무하다

예술단 공보실로 옮겨 41년 조율 외길인생

피아노를 옮기면 끝까지 확인하는 근성으로

조지 윈스턴 내한때마다 불릴만큼 실력 검증

“베테랑 기술자들을 일용직 일꾼 취급하는

그릇된 풍토가 명품 탄생 길 막아 안타까워”

- 대구에 있는 스타인웨이 중에서 가장 오래된 피아노예요

그의 목소리에 강한 자부심이 담겨 있었다. 평생이라고 해도 좋을 47년이라는 시간을 오로지 피아노 조율만 하고 살았단다. 예술회관에 드나든 시간도 그에 못잖아서 스타인웨이가 그에게는 또 다른 자식이나 다름없다고. 조율할 때 무슨 음에서 시작하느냐고 물었다.

- 당연히 a음이죠. 국제 표준음이고, 가장 안정적인 음이에요.

조율사가 a음을 눌렀다. 연주회 시작 전에 악장이 누르던 그 소리. 연주회 시작 전에 악장이 오보에 수석을 쳐다보며 누르는 건반, 그게 바로 a음이다. 오보에가 a음을 울림과 동시에 오케스트라 전 단원이 그 음에 맞춰 조율을 한다. 조율을 마치고 연주가 시작되기 전의 짧은 침묵. 지휘자가 지휘봉을 드는 것과 동시에 연주가 시작된다. a음은 악기의 소리를 하나로 모으는 첫 음이고, 아기의 첫울음만큼이나 의미 있는 음이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a음으로 음정을 맞추듯이 조율사 역시 a음으로 피아노 음을 고른다. 리허설을 위해 사전 조율을 두 번 하고, 연주 당일 아침에 다시 한 번 음을 가다듬는다. 조율의 목적은 일정한 음높이를 맞추어 청중들이 가장 편안하게 들을 수 있는 안정적인 평균율의 음계를 만들어내는데 있다. 조수미 씨는 연주 시작하기 전에 살짝 부탁을 한다던가. 440헤르츠로 맞춰둔 소리를 442헤르츠로 높여달라고, 작은 체구에 비해 음폭이 어찌나 넓은지 그녀가 노래를 하면 홀이 쩌렁쩌렁 울린다고 했다. 조수미 씨의 음량이야 충분히 짐작이 되고말고.

- 피아노 조율은 언제부터 하셨어요?

대학 시험을 쳤다가 떨어지고 기술이나 배우겠다고 오르간 만드는 곳에 근무하다 예술단 공보실로 자리를 옮겼다던가. 선배가 편한 일을 두고 힘든 곳으로 가겠다는 그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쳐다보더란다.

예술회관 무대의 나무 벽이 둥글게 휘어져 있었다. 박씨가 둥글게 휘어진 나무판을 통통 두드리며 앞자리 뒷자리 어느 곳에서나 좋은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해주는 음향판이라고 했다. 예술회관은 객석으로 좋은 소리를 전달하기 위해 벽에 붙이는 음향판의 모양까지 과학의 힘으로 분석하고 연구를 한다고 했다. 소리가 울리는 것을 막기 위해 바닥에 카펫을 깐 적도 있는데, 지금은 소리를 흡수하는 카펫 대신에 마루를 깔아서 소리를 뱉어내게 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예술회관을 오래 드나든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 이 나이에도 꼬박꼬박 찾아주는 사람이 있어요.

조지 윈스턴이 한국에 연주를 하러 오면 대행사에서 와달라는 팩스를 보낸다고 했다.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이 있어서 더욱 책임감 있게 일할 수 있다며 강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조율사가 책임감을 갖고 일하면 피아노도 언제까지나 생생하게 살아 있을 수 있다며, 대구의 스타인웨이만 아직 한 각도 갈지 않고 생생하게 살아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 혼자 일을 하는 시간이 많겠어요?

- 늘 혼자죠. 조율하며 정교한 소리를 들어야 하니까.

대부분 혼자 일을 하지만 큰 수리를 할 때는 무대 감독 하는 친구도 불러서 함께 일한다며, 자라섬에서 재즈공연이 한창 진행 중일 때 일어난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스타인웨이가 세계 최고의 명품이 된 것은 오로지

피아노를 위해 한 길을 걸어온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이, 나라와 국민이 다 함께 고급 기술을 가진

인재를 아껴줄 때 최고의 상품을 만들 수 있는 것이죠.

최고의 기술자들이 생활고를 해결하지 못하고

다른 일을 찾아가는 것이 무엇보다 가슴 아파요”

- 한꺼번에 천만 원을 벌었어요.

모처럼 친구들과 외국여행 가려고 준비 중이었는데 재즈연주회에서 급한 일이 생겨 여행경비를 돌려받았다. 떠날 날을 하루 앞두고 갑자기 스프링클러 작동으로 피아노가 물벼락을 맞았다는 전화가 온 것이다. 박씨는 스텝의 전화를 받자마자 무대감독 하는 친구를 불러서 현장으로 달려갔다. 자신에게 가장 먼저 전화를 해준 스텝이 너무나 고마웠다. 사람에게만 골든타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피아노도 마찬가지다. 나무가 물을 먹기 전에 분해해서 닦고 말렸기에 망정이지, 그때 스텝이 박씨가 아니라 윗사람에게 먼저 전화를 했다면 여러 절차를 거치는 동안 스타인웨이는 골든타임을 놓쳐 영원히 회생하지 못했을 거라고 했다. 그랜드 피아노는 부속을 풀어놓으면 양이 엄청나기 때문에 관객을 다 내보내고 부속을 무대에 널어서 말렸단다.

- 가장 감명 깊었던 연주회를 혹시 기억하세요?

- 흑인 영가가 가장 인상 깊었어요.

뉴욕 할렘가의 예술학교 학생 여섯 명의 보컬로 이루어진 ‘뉴욕 할렘싱어즈’의 공연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고 했다. 그들이 부르는 노래 중에는 가스펠송도 있지만 휘트니 휴스턴의 명곡도 섞여 있어서 울림이 더 컸다며, 박씨는 흑인영가의 감동적인 공연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그 밖에도 레스토랑에서 조율을 마치고 들었던 재즈싱어의 음악과 대봉성당 이층에서 들었던 여섯 명의 수녀님들이 부른 합창은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음악실이 이층에 자리 잡고 있어서 피아노 소리는 물론이고 성당 곳곳으로 울려 퍼지는 성가가 온몸에 소름이 돋도록 감동적이었다고 했다.

-표정이 참 밝고 평화로워 보여요.

내 말에 그는 마음을 항상 긍정적인 생각을 갖는다고 했다. 무슨 일이든 자기 일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선 먼저 자기 일을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 피아노를 옮기면 직접 가서 봅니다.

피아노가 제자리에 앉는 걸 봐야 마음을 놓는 그의 극성에 일하는 사람들이 불편해 할 때도 있다고 털어놓았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피아노 소리가 달라진다며 온습도가 적절할 때 피아노가 맑은 소리를 낸다고 했다. 피아노 탑보드를 닫아놓고 예술회관을 나오며 조율이 절대음감을 필요로 하는 일이냐고 물었다.

- 조율은 물리공학이어서 절대음감으로 조율할 수 있는 게 아녀요.

일을 하는 동안 오랜 숙련의 과정을 거쳐 체득된 것일 뿐, 자신에게는 절대음감 같은 건 없다고 했다. 박씨는 장인(匠人)들의 느낌이나 감은 오랜 숙련 끝에 가꾸어지는 기능이고 감각이어서 하루아침에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우리 사회가 인재와 기술자를 홀대하는 건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 큰 손실이라고 토로했다. 예전에는 피아노 부속을 일일이 수제로 깎아서 만들었는데 지금은 기계로 찍어낸다며, 점점 사람이 필요 없는 세상으로 변하는 게 슬프다고 했다.

- 장인(匠人)을 장인답게 하는 것은 직업에 대한 긍지와 소신이죠.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자기 일에서 최고가 되는 것이 진짜 장인이다. 옻칠 장인이나 도자기 장인 같은 각계각층의 장인들을 만나 보면 모두 그 나름대로의 집념과 긍지를 갖고 있다며, 박씨는 그 고집스러움이 한 길을 걷게 했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자기 일에 대한 소신이고 사랑이었다.

- 젊은 기술자들이 직업에 대한 긍지와 소신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스타인웨이가 세계 최고의 명품이 된 것은 오로지 피아노를 위해 한 길을 걸어온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나라와 국민이 다 함께 고급 기술을 가진 인재를 아껴줄 때 최고의 상품을 만들 수 있다며, 박씨는 최고의 기술자들이 생활고를 해결하지 못하고 다른 일을 찾아가는 것이 무엇보다 가슴 아프다고 했다.

- 스타인웨이가 최고의 음악가들에게 변함없는 사랑을 받는 이유를 빨리 깨달아야 우리도 명품을 가질 수 있어요.

베테랑 기술자를 일용직 일꾼 취급하고 고급인력을 예사로 자르는 그릇된 풍토가 문제라고 박씨가 분통을 터뜨렸다. 나라의 경제를 이끌어가는 사람은 정치인이 아니라 기술자들과 노동자들인 것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며, 하루하루를 노동으로 일관하고 있다 하더라도 마음만은 스타인웨이의 위엄을 간직하고 살아야 한다고.

/글 장정옥 소설가

(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