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종 경북대 교수
김규종 경북대 교수

나이 지긋한 축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 가운데 하나가 ‘낭만에 대하여’ 일 것이다. 환하게 빛났던 한때를 추억하며 ‘다방’에서 중년 마담이 따라주는 ‘도라지 위스키’를 홀짝거리는 후줄근한 가수의 표정이 손에 잡힐 듯 그려지는 노래. 100세 시대라 불리는 요즘 50-60 나이대의 사람들을 신중년이라 부른다. 예전의 40-50대 정도와 비슷한 정열과 체력과 욕망으로 무장한 신중년. 그들을 노인이라 부르면 서운해하리라.

인생의 절반을 살았고, 나머지 절반으로 달려가는 신중년. 이 무렵 누구나 생각이 많아진다. 젊어서 한칼 했던 사람일수록 뭔가 이루려는 의욕과 투지로 넘쳐난다. “나는 아직 한창이야, 내가 뭐 어때서! 이 정도면 쓸만하지, 안 그래!” 거울 들여다보면서 신중년 사내들은 혼잣말한다. 신중년 가운데 일부는 퇴직하여 ‘임계장’(임시 계약직 노인장)이 되기도 하고, 일부는 아내 눈칫밥 얻어먹으며 산이나 공원을 떠돈다.

신중년에 필요한 작업은 살아온 삶의 내력을 돌아보는 일이다.

인생에 목적이나 의도는 없겠으나,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온 날들인지, 총체적으로 성찰하는 작업은 남은 생을 요긴하게 살아가는 데 적실한 전제다. 주역 ‘계사편’에 “척확지굴 이구신야(尺<8816>之屈以求信也)”라는 구절이 나온다. 자벌레가 몸을 구부리는 것은 그것을 펴기 위함이다, 하는 뜻이다.

성찰 없이 전진만 하는 삶은 피 끓는 청춘의 몫이지, 피가 식어가는 신중년의 몫은 아니다. 젊은 날 신중년을 매혹하고 열에 들뜨게 했던 오욕칠정(五慾七情)과 거리 두면서 세상과 사회를 돌이키는 작업이 소중하다. 그렇다 해서 반드시 이성적이거나, 매사에 사려와 냉정 그리고 신중함을 유지해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신중년에게도 어린아이 같은 맑고 투명한 치기(稚氣)와 장난스러움 그리고 패기가 요구되기도 한다.

문제는 대다수 신중년이 너무 차갑고 계산적이거나, 반대로 너무 철이 없고 이기적이라는 데 있다. 양자의 조화로움을 유지하는 신중년은 나이를 먹어도 쉬 늙지 않을뿐더러, 고유한 매력으로 주위를 환하게 한다. 그러하되 신중년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많지 않음을 직시하면서 죽음을 생각하는 일이다.

생명 가진 모든 것은 소멸한다. 그것은 거역할 수 없는 자연의 철칙(鐵則)이다. 주위를 돌아보시라. 얼마나 많은 요양원과 요양병원이 성업하고 있는지. 그곳에 갇혀있는 수많은 노년도 한때는 신중년의 시기를 거친 분들이다. 누구도 그곳에 포획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삶이 허여한 일정한 육체와 정신을 탕진하고 나면, 어쩔 도리없이 여생을 거기서 보내야 한다.

그곳에 가기 전에 골똘하게 생각해야 한다. 나의 삶은 어떠했으며, 남은 시간을 어떻게 쓸 것인지. 관계와 인연은 어떻게 정리하고, 몸과 마음은 또 어떻게 갈무리할 것인지. 미래는 준비하는 사람 차지다. 두려워하지 말고 죽음을 깊이 사유하는 신중년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