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덕사에서 처음 옮겨간 영묘사(지금의 흥륜사).

종은 허공에 매달려 있어야 할 운명으로 태어난다. 그래야 허공을 울리는 종소리를 온 산천에 알리는 것이다. 절에서의 범종은 지옥의 중생을 위하여 울리지만 속세에서는 시간을 알리는 역할을 한다. 성덕대왕신종은 성덕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만들어 봉덕사에 걸었던 것이다. 그 봉덕사는 홍수(추측)로 절은 흔적도 없고 종만 북천가(지금의 경주세무서)에 뒹굴다가 네 번이나 옮기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그리고 종을 매달았던 종각도 종 따라 옮겼다가 지금은 종과 종각은 따로 떨어져 있다.

#. 성덕대왕신종을 4번이나 옮긴 사연

신라 33대 성덕대왕(701~735)이 죽자 아들 경덕왕이 아버지의 명복을 빌기 위해 종을 만들다 완성하지 못하고 릴레이 하듯이 바통을 이어받은 아들 혜공왕이 완성한다. 771년(혜공왕 7년)까지 34년의 길고 긴 시간과 신라장인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마침내 완성하여 봉덕사에 걸었던 것이다. 명작들은 각고의 노력과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성덕대왕신종이 있었던 네 곳과 마지막 자리 잡은 곳을 향하여 집을 나섰다. 처음 성덕대왕신종을 달았던 봉덕사 터였다고 추측하는 지금의 경주세무서(또는 성동동 제1사지)에 갔다. 현대식 건물이라 느낌이 없었지만 옛 봉덕사를 상상해보았다. 이 정도 오랜 세월과 씨름하여 만든 종을 둘 절이라면 보통 절은 아닌 국찰이었을 것이다. 언제 어떤 연유로 절이 없어졌는지는 알 수 없고 종만 뒹굴었던 것이다. 세무서 안이야 업무 때문에 간간이 왔었지만 오늘은 혹시라도 봉덕사의 흔적표지석이라도 있는지 외각을 다 둘러보았지만 없었다.
 

종과 종각이 있던 지금의 봉황대.
종과 종각이 있던 지금의 봉황대.

이 봉덕사가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절 무너져 돌 자갈에 묻히게 되니./ 종 홀로 황량하게 버려졌었네./ 아이들이 두들기고 소는 뿔을 비볐다네.”의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의 ‘봉덕사’시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그 전에 절이 폐사된 것을 알 수 있다. 19톤의 무거운 종이 본래의 자리에서 멀리 떠내려 갈 수는 없으니 북천냇가 인근인 이곳에 있었을 것이다. 홍수 때문이라는 것도 가능성의 추측일뿐이다. 어떻든 지진이나 홍수 등의 천재지변으로 봉덕사는 없어지고 거대한 종만 뒹굴었던 것이다.

다시 이 종을 1460년(세조 6년) 경주부윤 김담이 영묘사(지금의 흥륜사) 옆에 옮겨 걸었다. 첫 번째로 옮긴 흥륜사를 찾았으나 스님 하나 보이지 않고 고요한 가을 햇살이 적막을 깨우고 있었다. 여기서 나온 턱이 깨어진 웃을듯 말듯한 수막새는 신라의 미소로 대표된다. 잘 정리된 도심 속의 흥륜사를 뒤로하고 이곳에서 1506년(중종 원년) 경주부윤 예춘년이 읍성 남문 밖 봉황대 곁에 종각을 짓고 성덕대왕 신종을 옮겨달았던 봉황대로 갔다. 종각건물은 봉황대 우측 옆에 지어져 있는 옛 사진대로 찍어 보았다. 이제는 절에서 명복을 비는 역할이 아니라 성문개폐와 군사 징집할 때 종을 쳤다. 무덤 주인을 알 수 없는 이 봉황대 앞에는 1924년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금관이 나온 금령총(126호분)은 다시 정밀발굴하고 있었고, 길 건너 붙어있는 금관총은 1921년 우리나라 최초의 금관이 나온 곳인데 몇 년 전에 정밀 발굴하였던 곳이다. 봉황대 꼭대기에는 6·25때 포진지를 구축했던 곳이고 민가집들이 즐비하여 동네 뒷동산이었고 아이들이 죽으면 봉황대에 묻었다. 그러나 이 성덕대왕신종은 여기서도 인연이 다하여 나라 잃은 일제 강점기인 1915년 (구)경주박물관(지금의 경주문화원)으로 종각과 종을 옮긴다. 북으로 1km도 안 되는 (구)경주박물관으로 향했다. 문화원 들어가서 왼편에 쓸쓸히 서있는 종각으로 갔다. 매끄럽고 고운목재라기보다 울퉁불퉁한 목재를 사용하여 힘 있고 단단한 위용을 갖추고 있었다. 19톤의 종을 말없이 달고 있었던 종각은 지금도 경주문화원 문 들어가자마자 왼편에 초라하게 서있다. 경주문화원 본관건물은 향토 사료관으로 사용하는데 그 앞에 어울리지 않는 하늘 높이 솟은 긴 나무가 바싹 붙어 있다. 1926년 10월 스웨덴 구스타프 6세 황태자와 태자비 루이즈가 기념식수한 것이다. 이 본관 건물 왼쪽으로도 정착하지 못하고 60년 있다가 1975년 현재의 국립경주박물관에 시멘트로 종각을 짓고 건물은 그대로 두고 종만 옮긴다. 건물 종각은 여기에 있는데 종은 떠났으니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영원한 이별이었다.
 

네번째 옮겨온 국립경주박물관의 성덕대왕신종.
네번째 옮겨온 국립경주박물관의 성덕대왕신종.

#. 세계최고의 봉덕사종은 어떻게 옮겼을까?

마지막 둥지를 튼 국립경주박물관으로 갔다. 코로나 때문에 손 소독하고 신분증과 전화번호 기재하고 들어갔다. 월요일 오전이라 사람은 간간히 보였고 곧바로 성덕대왕신종으로 갔다. 종을 보호한다고 꽁꽁 감싸놓아 들판에 볏단을 비닐로 감싸놓은 듯하고 정육점에 고기 매달아 놓은 것이 연상되어 안타깝다. 2022년까지 3년 동안 보존상태를 점검한다고 해괴하게 해놓았다. 다른 유물과 달리 종의 역할은 몸을 맞으면서 소리를 울리는 것이라 종은 깨어질 때까지 치다가 그때 보존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박살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아무리 박물관이 유물의 보존이 최우선이지만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은 종을 모독하는 것이다.

세계에서 제일 큰 종인, 성덕대왕신종보다 10배나 더 큰 200톤의 러시아 크레물린 궁전의 ‘황제의 종’은 만들다 깨어져 한 번도 쳐보지 못했고, 마국의‘자유의 종’도 깨진 채로 보존되어 있다. 종교의 의례같이 매일 치는 것도 아니고 1년에 한번 치면 100년은 쳐도 100번인데 그 정도 쳐도 아마도 괜찮을 것이다. 그리고 수명이 다 할 때까지 맑은 깨달음을 전해주고 생명을 다하는 종은 얼마나 장엄한 아름다움인가?

종은 무엇으로 평가하는가. 가수가 아무리 춤을 잘 추어도 노래가 안 되면 백 댄스를 해야 하듯이 종은 명복을 빌고 시간을 알리더라도 소리가 아름다워야 된다. 즉 종소리는 부처의 음성을 삼았기 때문에 얼마나 공을 들였겠는가. 서양종은 안에서 쇠와 쇠가 부딪치기 때문에 딸랑거리는 가벼운 쇳소리라 깊은 울림이 없다. 이에 비해 우리의 종은 나무로 금속을 치기에 소리가 융화되고 화합하여 부드럽고 장중한 깊은 울림이 온다.

 

두번 째 옮겨간 봉황대옆 종각 종.
두번 째 옮겨간 봉황대옆 종각 종.

이 성덕대왕신종이 모양과 소리에서 누구나 인정하는 것이지만 세계최고의 종이다. 여러 서양학자들도 극찬했지만 그중 독일의 고고학자 켄멜 박사는 “이 종이야말로 세계 제일의 종이라 부를만하다. 만약 독일에 이 같은 종이 있다면 종 하나만 가지고도 훌륭한 박물관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했다. 필자는 2002년 10월 9일 한글날 옆에서, 2003년 개천절에는 반월성 위에서 직접 들어보았다. 첨단 기계가 못 잡아내는 끊어질 듯 이어지는 맥놀이 현상의 여음을 들을 수 있었다. 녹음해놓은 테이프나 CD로는 그 여음을 못 잡아낸다. 성덕대왕신종 소리 듣고 다른 종소리 들으면 깡통 치는 소리가 들려 듣기 힘들다.

그래도 종에 새겨놓은 630자의 서문과 200자의 명이 명문장이다. “성덕대왕신종 명을 한림랑 김필해(또는 김필계, 김필오)는 왕명을 받들어 짓는다. 무릇 지극한 도는 형상밖에 있으니 보려 해도 볼 수가 없고, 진리는 천지간에 진동하나 들으려 해도 들을 수 없다. 그러므로 비유의 말을 내세워 오묘한 진리를 알게 하듯이 신종을 달아 일승 (一乘)의 원음을 깨닫게 한다. 경술년(771년) 12월 해와 달은 한층 빛나고, 음양의 기운은 고르며, 바람은 부드럽고 하늘은 고요하여 신종을 이루었다. 그 모습은 태산이 우뚝 선 것 같고, 그 소리는 우렁찬 용의 소리 같았으며, 위로는 지극히 높은 하늘과 아래로는 지옥에 이르기까지 막힘없이 울리어 보는 이는 기이함을 느끼고 듣는 이는 모두 복을 받을 것이다. 명문장이라 심금을 울리는 깊은 감동을 받아 가슴에 담아놓고 있다.

종 왼쪽 하단에 세로로 깊게 파인 자국은 이 종의 가루를 끓여먹으면 남자를 낳는다거나 낙태된다고 파갔던 것이다. 종의 북쪽 아래는 주종 대박사 박대나마 기념비가 있다.

세번째 옮긴 경주 문화원에 있는 종각.
세번째 옮긴 경주 문화원에 있는 종각.

성덕대왕신종은 어떻게 옮겼을까?

1398년(태조 7년) 남한산성 주조소에서 종을 완성하고 한양(서울)의 보신각으로 옮길 때 1천300명의 군졸을 동원하여 10일에 걸쳐 옮겼다. 이에 비해 성덕대왕신종은 같은 시내 권에서 서로 3km를 넘지 않아 비교적 쉬웠을 것이지만, 현대적인 장비가 없던 시절에 소나 말을 이용한 그들만의 노하우는 있었을 것이다. 1975년에는 대한통운의 트레일러로 옮기면서 종과 트레일러의 총 50톤을 통과할 수 있는 다리가 없어 약간 둘러오는데 이제는 높이가 6m나 되어 당시 전깃줄이 걸려 한전 전공들이 차가 지날 때마다 전깃줄 끊고 다시 이었던 것이다. 경주시민 10만 명이 뒤따랐다는 전설적인 광경이었다.

성덕대왕신종을 복제한 종은 제야의 종을 치는 서울의 보신각종, 미국 로스앤젤레스 인근에 있는 미국건국 200주년 기념 종(korean Bell of Friendship), 2016년 구 경주시청 자리에 신라대종이 있지만 소리는 흉내 낼 수 없는 것이다.

이 종의 수난만큼 사라질 뻔한 큰 위기를 맡는다. 조선초기 숭유억불정책으로 전국에 종들을 녹여 무기를 만드는데 이 종도 대상이 되었지만 세종대왕의 특별조치로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이다. 한글 창제한 것만으로도 우리민족에게 위대한 업적이었는데 역시 세종은 성군이었다.

종은 울어야 생명인데 지금은 생명 없는 죽은 종을 매달아놓아 안타깝다.

/글·사진=기행작가 이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