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을 들어서면 보이는 오도암과 청운대. 오도암은 군위군 부계면 원효길 280-103에 위치해 있다.

하늘 정원을 향하는 길은 인파의 물결로 가득하다. 하늘은 흐리고 억새는 하얗게 부풀어 시리다. 청운대 절벽에 자리 잡은 서당굴은 원효가 6년간 수도해 깨달음을 얻은 수도석굴이다. 접근조차 쉽지 않은 천인절벽에 어떻게 굴을 만들었는지 쉽게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 팔공산의 천기가 서려 있어 한 시간만 앉아 있어도 정신이 맑아진다는 좌선대 이야기도 결코 빈말이 아닌 듯하다.

오도암은 쏟아질 듯 가파른 나무계단을 끝없이 내려가야 한다. 툭 트인 경관이나 송신소의 탑들도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묵묵히 긴장을 놓치지 않고 아래로아래로만 향한다. 오도암까지 714계단, 남은 거리가 줄어들수록 올라올 일에 대한 걱정이 무게를 더한다.

더 이상의 나무 계단은 보이지 않고 열려 있는 사립문 너머로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가 쏟아져 나온다. 당황스럽다. 거북이 형상의 나지막한 돌탑 뒤로 무릉도원처럼 숨어 있는 암자, 소박한 풍요로움이 보인다. 시끌벅적한 소리는 모조리 숲에 흡수되고 말지만, 어수선함 속으로 구겨넣듯 나를 밀어넣고 싶지가 않다. 산문 앞에서 조용해지기를 기다린다.

한 차례의 등산객과 아이들이 빠져나간 뒤 절은 조용해졌지만, 소란함 뒤에 찾아온 고요는 어딘지 어색하다. 지은 지 오래되지 않은 대웅전, 활짝 열린 법당문 안으로 허리 꼿꼿한 어느 보살님의 뒷모습이 유난히 아름답다. 관음전 법당에도 경전을 읽고 있는 처사님이 보이고 스님은 아궁이에 불을 지피느라 정신이 없다.

언제 소란스러웠느냐는 듯 모두가 자기 일에 빠져 있다. 적송 숲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는 절 뒤로 청운대가 하늘을 떠받치듯 신비스럽다. 나는 티 없는 암자의 분위기에 매료되어 마당을 서성이고, 남편은 어느 새 대웅전 법당에서 백팔 배를 시작하고 있다.

오도암은 신라 무열왕 원년(654년)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깨달음을 얻은 곳이다. 963년까지 폐사로 남아 있다 운부암 선원장 불산스님의 원력으로 천년고찰의 역사를 다시 쓰게 되었다. 일타스님이 썼다는 불인선원(佛印禪院) 현판이 토담벽에 걸려 무구한 그리움을 더한다. 부처로부터 직접 인가를 받은 곳이란 뜻이다.

선지식 일타스님이 생전에 이곳에서 일주일만 살아보고 죽는 것이 소원이라 했다는 오도암 마당을 나는 훌쩍 바람처럼 달려와 감격하고 있다.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르는 오도암의 언어 앞에서 잠시 시간이 멈춘다. 오늘은 삼배의 예만 갖추기로 했다. 자리를 뜰 줄 모르고 경전을 읽는 불자의 자태가 부처님보다 크게 다가온다. 오래 머물 수가 없어 조심스럽게 법당을 빠져나온다.

요사채 옆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걷는다. 방하각이란 나무정자를 지나자 숲 속에 투박한 나무집 하나 홀로 쓸쓸하다. 내부가 보이지 않는 오두막은 스님의 수행 공간인 듯, 단호하면서도 고독하다. 문명사회에 반대하며 월든 호숫가에 독립적으로 살아가던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떠오른다. 자연에 대한 경이로움과 영적 자아를 발견하던 그의 오두막 풍경도 이보다는 풍족했으리.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는 어록을 되새기며 깨달음을 구하는 스님을 위해 오두막도 좌선 중이다. 주체적인 삶을 위해 섬처럼 홀로 떠 있는 오두막, 멜랑콜리한 감성은 달아난 지 오래다. 잃어버린 여름이 떠오르고 묵직한 가을이 자꾸만 내 안으로 밀려들어 온다.

나는 마당가 통나무벤치에 앉아 경전에 빠져 있는 두 불자의 모습을 지켜본다. 대웅전과 관음전에 떨어져 앉아 금강경을 읽고 있는 두 분은 아무래도 부부 같다. 같은 방향을 걷고 있는 삶의 자세가 그윽하다. 스님은 키 낮은 아궁이에 온몸 낮춰 불을 지피고, 뒤란에서는 차담을 나누는 도반들의 대화가 익어가고 있다. 고요한 성실성이 암자를 밝힌다. 무심코 산문을 들어서는 등산객의 투박한 발걸음조차 평온하게 녹아든다.

잠시 경전을 읽다 휴식을 취하러 나온 불자와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선한 눈매와 차분한 말투, 그 안에 오래도록 쌓아올린 견고한 탑 하나 보인다. 휴일이면 오도암에 와서 경전을 읽으며 하루를 보낸다는 부부가 존경스럽다. 나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 평범한 이의 낮고 조용한 발걸음에서 오는 울림은 크다. 대책없이 그 삶의 자세를 탐낸다.

나조차 몰랐던 헛된 욕심에 붙들려 세월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본다. 계절은 또 쓸쓸히 멀어져 갈 것이다. 운이 좋아 땔감을 가지러 산문을 나서는 스님과 마주친다. 환한 미소가 편안하다. 몸과 영혼이 건강해 보이는 석범 스님이다.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에 선뜻 들어서지 못한 나와 달리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는 불자님과 아이들의 순수함이 좋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스님, 내 쪽으로 외로운 바람이 분다.

조낭희 수필가
조낭희 수필가

휴일이라 등산객의 발길이 드문드문 이어지고 있다. 조용한 날 사시예불에 참석해 보기로 약속하며 산을 내려온다. 남편은 내려왔던 계단을 다시 올라가고, 나는 무명의 어둠에 갇혀 파닥거리는 스스로를 부축하며 산을 내려온다. 이 가을도 나를 기도하게 만든다.

삶의 근간은 성실이다. 섣부른 열정에 기만당하고 싶지 않아 나는 몇 번이나 스스로에게 정직한지 되묻는다. 하지만 원효 구도의 길은 흔들림 없이 평온하다.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침묵 속에 스스로를 맡긴 채 물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