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과상 가운데 장미닮은 홍옥정과

어린 시절, 나는 과수원집 손녀였다. 과수원은 낙동강 지류가 바로 가까이 있는 모래밭이라 물 빠짐이 좋아 과일 농사가 잘 되는 땅이었다. 사과나무가 많았고 자두 몇 그루, 복숭아 서너 골, 나무 사이에 땅콩이나 잎채소가 심겨져 있어 계절마다 밥상이 풍요로웠다.

사과는 여러 이름으로 불리었다. 단맛이 많고 익을 때까지도 푸른 인도, 초록빛이 단풍들듯 노랗게 익는 고리땡은 할머니가 좋아하셨다. 육질이 단단해서 겨울 내내 언니와 나의 주전부리가 됐던 국광, 사과 맛이 한참 그리울 때 제일 먼저 수학했던 풋사과 아오리, 빠알갛고 앙증맞은 얼굴로 저절로 손이 가게 만들어 따먹게 유혹하는 홍옥이 있었다.

지금쯤 과일 가게 맨 앞줄에 나앉은 건 홍옥이다. 아주 잠깐 보이는가 싶게 자취를 감춰버리기에 보일 때 얼른 사야 한다. 뽀드득 소리 나게 옷에 슥슥 닦아서 한 입 베어 물면 입속 가득 새콤함이 퍼진다. 생각만으로도 침이 고인다.

우리 과수원에 있던 그 많은 품종 중에 지금은 홍옥이 살아남았다. 국광은 부사나 새로이 개발된 더 아삭하고 단맛이 강한 더 큰 사과로 대체된듯하다. 홍옥은 그 특유의 빨강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잃지 않았다. 십여 년 전, 중국 여행길에 도장을 새겨주는 곳에 들렀었다. 이름을 새겨준다며 도장 재료를 고르라고 했다. 보석이나 나무 돌 같은 여러 소재가 있었다. 그중에 홍옥이라는 붉은 도장이 눈에 쏙 들어왔다. 이름도 반갑고 그 붉은 색이 ‘나를 데려 가세요.’라고 눈짓을 했기 때문이다. 빠알간 홍옥에 내 이름을 새겨서 데려왔다.

홍옥을 또 만난 곳은 영덕 언니네이다. 어머님 제사에 쓸 쑥떡을 만들어 놓았으니 가지러 오라는 전갈이었다. 얼른 달려가니 거실에 어여쁜 다과상이 차려졌다. 나만을 위한 차림이었다. 대접은 이렇게 해야 하는구나, 입이 떡 벌어져 그 아름다움에 한참 취했다. 이렇게 예쁜 것을 먹어서 없애버리면 안 될 것 같이 고왔다.

그 중앙에 활짝 피기 바로 전의 장미 모습의 정과가 있었다.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홍옥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언니의 설명이 없다면 주재료가 홍옥인 줄 몰랐을 것이다. 홍옥이 장미로 변신하는 과정을 들려달라고 졸랐다. 홍로나 붉은빛이 나는 다른 사과로 해 보았지만 색깔이 안 나, 홍옥이 잠깐 나올 때 자주 과일 가게를 살펴서 사야 한다.

빤질빤질 빨간 홍옥을 4/1쪽으로 잘라 씨를 발라내고 얇게 저며 설탕을 켜켜이 뿌린다. 하루쯤 절이면 딱딱하던 것이 호리호리해진다. 노골노골해진 사과를 소쿠리에 건져 설탕물을 빼준다. 건조기에 살짝 말리면 일이 빠르고 수월해진다. 약간 꼬득꼬득 해지면 꽃으로 접는다. 꽃모양으로 네다섯 조각을 이어붙인다. 큰 꽃은 더 많이 붙이면 된다. 홍옥이 가을에 2-3주 잠깐 나오고 마니 일 년 쓸 것을 만들어 냉동 보관하다 오늘처럼 손님이 오면 꺼내서 사용한단다. 경숙 언니는 살림꾼이다. 홍옥정과와 함께 차에 곁들이는 것이 많다. 연근정과, 금귤정과, 호두곶감말이, 여러 과일 모양의 화과자와 양갱, 약과와 유과, 추석이 얼마 전이라고 꽃송편까지 새로 쪄서 내놓았다. 색색깔의 과일 몇 가지에 작은 수반에 꽃도 꽂았다.

김순희수필가
김순희
수필가

돌아오는 내게 떡 상자 말고 한 보따리를 안겨주었다. 떡 찍어 먹으라고 직접 만든 조청 한 통과 곁들여 낼 호박식혜는 대여섯 시간을 달여서 만든 것이다. 남편 도시락 반찬 하라고 비트를 넣어 핑크빛이 도는 무연근 피클도 한 통 얹어준다. 한 살림이다.

언니의 살림 솜씨를 따라 할 자신은 없다. 손이 야무져서 음식이든 싱크대든 손만 대면 다른 사람과 다른 경지의 것을 만들어 낸다. 타고난 DNA도 있겠지만 새로운 것을 보면 물어보고 집에 와서 꼭 따라 해보는 언니의 실천력이 지금의 명인을 만들었다. 나이를 잊게 만드는 열정이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격하게 반응하고 좋은 것에 칭찬을 아끼지 않는 성품에 어디든 환영받는 언니다. 언니의 마음을 오래 간직하려고 마음 냉동고를 하나 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