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나의 파주 책 ‘공장’에서는 큰 행사가 있었다. 새로 책이 들어온 것이다.

파주 책 공장이라 하니 그 유명한 파주 출판단지 얘기인가 하시겠지만 그것과는 거리 멀다.

출판단지에서도 줄잡아 사십 분은 더 들어갈 곰쓸개 웅담리에 서울에 있던 책을 옮겨 놓은 것이다.

원래는 식품공장으로 쓰던 곳이었다. 거기 꽉 찬 기계며 비품들을 비워내고 책을 정리해 두려고 만든 새 공간이 바로 책 공장 그것이다. 산뜻, 깨끗하면 좋겠지만 아직도 공장 먼지를 털어내지 못한, 누추하기 짝이 없는 곳. 여기에 우체국 박스로 60개 넘는 책들이 새로 들어왔다. 전날부터 부산에서 책을 트럭 한가득 싣고 오시는 분과 시간을 맞추어 두었다. 아침부터 불광동에서 파주를 향해 출발, 문발리에서 잠깐 다른 일 보고 올라오는 차보다 늦을세라 종종걸음을 쳤다. 가면서 전화해 보니 아직 신갈쯤 오셨단다. 거기서 오려면 서울을 에둘러서 한 시간은 더 있어야 한다. 비로소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이윽고 차가 오는데 1톤 트럭에 책 박스가 그득히 실렸다. 곧 또 부산까지 내려가야 한다고 두 분이 서둘러 짐을 부리는데 제법 큰 우체국 박스가 공장 바닥에 두 줄로 길게 늘어섰다. 이 많은 책을 다 어떻게 하나? 원주인이 남기신 책들 앞에서 앞으로 정리할 걱정이 태산 같다. 아무려나 문방칼과 가위를 가져다 몇 박스 개봉을 해본다. 나와 약 십 년은 연배 차이가 있으셨건만 당신의 지적 ‘재산’은 놀라울 정도로 나의 것과 같다. 많은 책들이 이미 내가 갖고 있던 책들과 겹쳐 그분과 나의 공동의 정신을 가리키고 있다.

옛날부터 전해져 오는 말로, 옛날 이야기를 좋아하면 가난하게 된다던가 했다. 오늘 여기 하나 덧붙여 책을 좋아하면 가난을 면키 어렵다 할 것이다. 얼마나 귀한 책인가. 옛부터 사람들은 책을 숭상했으니 그 속에 든 온갖 것이 사람의 정신을 살찌게 해준다 믿었다. 이런 책의 ‘위의’가 무너져내리는 오늘이다. 묵직한‘물성’이 환대받던 시절은 갔다. 여기저기 처치 곤란이라는 투정들이 많다. 젊었을 때는 책을 그렇게 좋아하던 사람들도 차차 나이가 참에 책의 부피와 무게를 감당하기 힘들어 한다. 급기야 학교를 그만두거나 새 집으로 이사라도 할 량이면 어떻게든 한꺼번에 처분하고 싶어진다. 받을 곳도, 받을 사람도 없어 수소문이라도 할 지경이다. 그나마 좋은 책은 가려 갖고 넘기려 하니 누군들 반기워할 수만도 없다.

책이 천덕꾸러기가 된 시대에 나는 왜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나? 이 많은 책들은 나중에 어떤 처분을 받으려나? 어느덧 남은 날이 살아온 날보다 훨씬 적을 지경이다. 이 책들의 쓰임을 위해 없는 지혜를 짜내야 할 판이다.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 <한국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