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길수<br>수필가
강길수
수필가

이곳저곳에서 결혼식 팡파르가 울린다. 노란 예복을 차려입은 민들레 아가씨들의 결혼식이다. 새로 태어난 지 한 달 남짓한데 벌써 결혼을 한다. 조혼(早婚)이라도 너무 이른 혼인이다.

어디 그뿐이랴. 민들레 아가씨들에 뒤질세라 벌써 돌잔치를 푸짐하게 벌이는 강아지풀들이 도처에서 싱글벙글한다. 함께 어우렁더우렁 사는 풀들의 축복을 받으며 풋열매를 단 강아지풀 꼬리들이 바람에 살랑댄다. 한족에서는 참새 떼가 작은 바랭이 열매로 아침밥을 먹는다. 가까이 다가가자 우르르 밥상을 물리고 날아오른다. 참새들에게 미안하다. 하지만 바랭이들에게는 내가 고마운 과객이 아닐까.

다른 곳은 외래종으로 보이는 풀들도 꽃을 피우고 있다. 한여름 천지개벽보다 더할, 몸이 댕강 잘려 나가는 고통을 당했던 풀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 새봄의 작고 여린 자태를 여지없이 드러낸 풀들이다. 어떻게 저 어린 풀들이 그새 꽃을 피우고 열매까지 맺을 수 있단 말인가. 사람이라면 아동기이지 않은가. 아동이 형편상 가장을 떠맡는 경우는 있어도 아동끼리 혼인하는 것은 본 적이 없다.

구월 중순. 아침저녁 지나다니는 한 학교의 녹지 이야기다. 가을 초입인데 녹지의 풀들은 봄날의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지난 팔월 초, 뜨거운 날씨 아래 녹지의 풀들은 벌초를 당했었다. 풀들은 그 고통과 역경 속에서도 한 달여 만에 연록 초지를 만들어 냈다. 귀뚜라미 소리 청아해지자 녹지는 느닷없이 조혼의 열기로 가득 찼다. 조혼 페스티벌이 벌어진 것이다. 가을이 가면 세상에 태어난 본분(本分)을 다할 수 없기에 절박한 것인가. 어린 나이에도 풀들은 시시각각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있다.

열흘 전쯤인가. 간밤에 비가 내린 아침 출근길이었다. 여린 풀잎들은 손에 손마다 빗물 이슬 머금고 오가는 이들에게 연록 생명의 빛을 선물하였다. 초가을에 초봄의 정서를 만끽하는 기쁨을 맛보고, 체험하는 귀한 복도 누렸다. 몸이 동강 난 끔찍한 상황에서도 매 순간 억척스레 살아내는 당찬 모습이, 내 기대를 채워주고도 남았다. 고통과 희생 뒤에 따라오는 삶이, 값지고 아름답다는 사실을 또다시 일깨워주는 아침이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나와 너, 지구촌 사람들이 이 녹지의 풀보다 더 급박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도 모른다. 심각한 기후변화 하나만 보더라도 많은 이들이 피부로 느끼듯 지구촌은 미래를 장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각국 정부와 국민들은 당장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 생존 문제 앞에 정치와 권력은 무엇이며, 국제 이해관계와 패권이 다 뭐란 말인가. 풀은 뿌리라도 있어 다시 살아나지만 사람은 그렇지 못하지 않은가. 풀들은 씨앗을 만방에 퍼뜨려 기후변화에 대응한다. 본래 생명에게 주어진 본분이 삶의 최우선이며 결국 그 전부가 된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모르는가. 알면서도 외면하는가.

여러 문화권에서 인간은 대부분 자신의 이익, 위신, 체통, 권위, 권력 등을 얻기 위해 조혼을 해왔단다. 우리의 경우도 과거 ‘민며느리’나 ‘데릴사위’가 성행했었다. 자연히 조혼으로 인한 어린이들의 인권이 유린되거나 침해되고, 여러 비극도 불러왔었다. 반면, 풀들은 환경이나 상황변화에 발 빠르게 대처하여 살아내고 있다. 벌초 당해 새로 태어난 지 한 달 남짓 시간 만에 혼인 하고, 열매를 맺으며, 조혼페스티벌을 벌이고 있는 이 녹지가 그 증거다.

푸른 행성 지구촌에 생명은 왜 태어난 걸까. 자연은 예외 없는 인과법칙 안에 존재한다. 이로 미루어 보면 어떤 과학자가 주장하듯, 생명이 바다에서 우연히 태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생명을 설계하여 만들고, 관리하는 지성체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가 창조주든, 신(神)이든 생명에게 주는 본분이 있으리라. 본능을 뛰어넘는, 생명이 마땅히 해야 할 바 같은 것 말이다. 내 눈에는 이 녹지의 여린 풀들이 생명의 본분을 다하고 있다. 만일 우리 인간이 저 풀들처럼 살아왔다면 오늘날 환경문제와 기후변화의 소용돌이는 생기지 않았으리라.

풀들의 조혼 페스티벌이 성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