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대로 되지 않는 감정 중 으뜸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어리석음이요, 유치함이요, 수치요, 절망이요, 나락입니다. 사랑을 일컬어 현명함이요, 세련됨이요, 자긍이요, 희망이요, 천국이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사랑이란 감정을 초월했거나 겉보기 사랑을 하거나 그도 아니면 사랑이란 말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은 어떻게 올까요. 대개 그것은 찰나의 순간과 맞닥뜨립니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사람이 사람을 판단하는 데는 첫 3초면 충분하답니다. 3초의 판단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지만, 그 판단의 중심 감정 중 하나가 사랑입니다. 감성이 풍부할수록 첫 3초의 편견인 사랑의 마법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 짧은 시간에 상대의 마음을 사버린 것을 일컬어 우리는 사랑에 빠졌다고 말합니다. 계산이 들어찰 여유가 없고, 판단을 유보할 사유가 없는 시간이지요. 사랑을 하려고 작정한 게 아니라, 순식간에 사랑의 조명탄을 맞아버리는 일이니까요.

봄물 오르는 캠퍼스 느티나무 그늘을 지나던 남학생. 잔디밭에 앉아 여흥을 즐기는 일군의 무리를 발견합니다. 같은 과 친구들인 그들은 한낮의 고스톱을 즐기는 중입니다. 그 중 고스톱 패를 돌리던 한 여학생에게 시쳇말로 필이 꽂힙니다. 모든 빛이 여자 주변만 비추는 듯합니다. 햇빛 받아 반짝이는 머릿결, 화투장을 내리찍는 여자의 긴 손가락 끝에도 햇살이 머뭅니다. 심장이 멎는 듯하고 구름 속을 헤매는 심정입니다. 붕 뜬 허공에서 지상에 발 디디게 해 줄 이는 저 여학생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이 모든 게 순식간에 일어난 내적 반응이지요.

집에 돌아와도 알 수 없는 감정은 지속됩니다. 수줍은 듯 짓궂은 여학생의 표정, 화투장을 돌리던 희고 긴 손가락이 미끼처럼 눈앞에 어른거립니다. 덥석 물고 싶을 만큼 강렬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집니다. 봄풀처럼 해사한 얼굴도 아니고, 날렵한 몸매로 캠퍼스 이곳저곳을 누비던 여학생도 아닙니다. 어떤 이유도 조건도 없습니다. 그냥 설명할 수 없는 순간의 상황 앞에 마음의 파고가 일렁인 것이라니까요. 굳이 말하자면 3초의 편견이 사랑의 마법이 되는 순간이랄까요. 스스로도 납득하지 못하는 그 찰나를 흔히 운명이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불교 용어 중에 돈오(頓悟)와 점오(漸悟)라는 말이 있습니다. 수행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단박에 깨치는 것이 돈오이고, 수행의 공을 쌓아 서서히 깨닫는 게 점오입니다. 딱 들어맞진 않지만 사랑에 그 말을 적용해 봅니다. 돈오의 사랑이야말로 순정한 사랑이라 할 만합니다. 점오의 그것은 타협과 조정의 의미가 깃들어 있기 때문에 그 시작이 돈오의 사랑만큼 순수하지는 않습니다. 흔히 나이 들도록 사랑 한 번 못해 봤다고 말했을 때, 이는 돈오의 사랑을 못해봤다는 의미에 더 가깝습니다. 타협이나 필요에 의한 사랑도 사랑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찰나적 사랑만큼 강렬하지는 않습니다.

서서히 물드는 쪽이 아니라 찰나적 사랑이 그 염결성에 더 가깝습니다. 흐린 눈이나 달뜬 가슴으로 봐야 첫 3초의 마법에 걸릴 수 있습니다. 정돈된 상태의 이성적 머리가 세팅되는 순간 즉흥적인 순정이 들어찰 자리는 없는 거지요. 고요한 찻잔 속의 물이거나 흔들리지 않는 나무의 잎새라면 그건 사랑일 리 없습니다. 감출 수 없는 어리석은 낯빛과 가라앉힐 수 없는 활화산 같은 심박수 그것이 사랑이지요. 첫눈에 반했다는 말은 거짓일 수가 없지요.

김살로메소설가
김살로메
소설가

사랑은 무모함입니다. 베이는 줄도 모르고 맨몸으로 칼끝을 향해 돌진하는 무지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실체였는지를 알 때까지 그 사랑은 지속됩니다. 하지만 사랑의 실체를, 그 속성을 자각하는 순간은 기어이 찾아오고 말테지요. 애석하게도 사랑의 환상이 부서지는 그 필패의 시간은 사랑의 덫에 걸린 속도에 반비례해 질척거립니다. 그래도 머잖아 마법은 풀리기 마련이고 칼날 스친 자리엔 아련한 상흔만이 남습니다. 회한조차 희미해질 때쯤이면 그 상처 몽돌이 되어 심지(心志) 하나 키웁니다. 무뎌진 그것은 칼날을 벼리지도 제 심장을 겨누지도 않습니다. 유유자적 세파에 씻기는 평온의 둥근 돌이 되어 가는 것이지요. 사랑에 빠질 리 없는, 지속 될 이 평화를 우리는 또 사랑이라 부른다지요.

환희의 꽃밭인 줄 알았지만 소금밭을 헤매는 바람. 키질에 남는 열매보다 풍구에 날아가는 쭉정이라야 ‘찐’인 사랑. 오늘도 사랑 때문에 누군가는 핸드폰 문자를 수십 번 확인하고, 울리지 않는 현관 벨 소리에 귀를 당겨 세웁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속수무책이 아니면 사랑이 아니고 무너질 3초가 아니면 사랑이 아니니까요. 수천 번의 참사를 예감한대도 모순의 통점인 사랑은 ‘하는 것’이 아니라 ‘빠지는 것’이라야 유효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