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젊었을 때는 공부란 지식을 쌓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문학, 철학, 종교, 예술, 역사…. 각 분야를 총망라한 지식의 체계로 인간과 세상을 이해하고자 했다. 그래서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읽었다. 하지만 독서량이 늘어갈수록 인간도 우주도 인식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이어서 지식의 거미줄로는 얽어맬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지식은 무지(無知)의 어둠을 밝혀줄 광명이 아니라, 오히려 속박과 질곡이 되어 무명에 갇히게 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인간의 모든 갈등과 분쟁은 무지에서 오는 게 아니라 무얼 안다는 것에서 야기된다는 걸 알았다. 모든 지식이란 부분적인 것일 수밖에 없고, 부분적인 지식이란 결국 편견일 수밖에 없기에 그렇다. 편견은 독선과 아집을 불러오고, 독선과 아집은 걸핏하면 충돌해서 불화와 분쟁을 일으키게 마련인 것이다. 바둑의 초보자는 열심히 정석을 익히지만 어느 단계에 올라서는 그 정석을 버릴 줄도 알아야 진정한 고수가 된다고 한다. 처음에는 지식을 쌓는 공부를 했을지라도 나중의 공부는 그 지식을 넘어서는 것이라야 한다는 얘기다.

고 김수환 추기경이 아주 단순하게 그린 얼굴 밑에‘바보야’라고 쓴 자화상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 분이 평생을 바친 독서와 명상과 기도를 통해 마침내 도달한 것이 고작‘바보’였다니. 현자(賢者)는 어리석은 것처럼 보이고, 대성(大成)은 모자란 것처럼 보이고, 대교(大巧)는 졸렬한 것처럼 보인다고 한 노자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늙어서의 공부는 어리석게 보이고 모자란 것처럼 보이고 졸렬해 보이는 공부라야 한다는 생각이다. 잘나고 똑똑해지는 공부가 아니라 단순하고 소박해져서 바보가 되는 공부라야 한다는 것이다.

평생을 공부랍시고 해서 내가 얻은 것도 남다른 재주나 능력을 갖지는 못한 대신 빈털터리로 사는 것에 이골이 난 것이 고작이다. 결국 채우는 공부가 아니라 비우는 공부였던 셈이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니 잃을 것도 없어 죽음 앞에서도 별로 미련이 없을 터이다. 소설가 박경리 선생은 말년에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고 하셨는데 나는 버릴 것도 없으니 다만 허전할 뿐인가.

많이 벗어난 얘기지만, 요새 우리나라 아이들의 공부는 지식의 탐구는커녕 출세를 위한 ‘스펙’이 목적인 것 같다. 그러니 부모들도 자식을 위한답시고 지위나 권세, 편법과 비리를 다 동원해서 자식들의 스펙 쌓기에 이바지한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이른바 ‘조국 사태’가 그 실상을 잘 보여주었다. 자신은 그럴 능력이 없어 자식들에게 미안하고 자괴감이 들었다는 부모들도 있는데, 정말로 그런 마음이 들었다면 그들은 조국을 나무랄 여지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다. 제대로 된 보모라면 ‘봐라, 나는 적어도 너희들을 저런 식으로 교육하지는 않았다’라고 당당하고 자랑스럽게 말해야 옳지 않은가.

‘아빠가 조국이 아니어서 미안해’라거나, ‘엄마가 추미애가 아니어서 미안해’가 아니라, 적어도 그렇게는 살지 않은 것에 긍지와 자부심을 가진 부모라야 건강한 부모다. 그런 부모의 슬하에서 반듯한 자식이 나온다. 공부가 전혀 안 된 사람들이 너무 많은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