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규열 한동대 교수
장규열
한동대 교수

‘세상은 남자들의 작품이다.’ 프랑스 작가 시몬느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가 남긴 말이다. 세상이 남자들의 관점으로만 해석되고 구성되며 운영되는 일을 꼬집었다. 세상이 그렇게 된 까닭을 설명하려 하지만, 그 어느 설명도 가당치 않다고 했다.

미국작가 캐롤라인 페레즈(Caroline Perez)는 그의 책 ‘보이지않는 여성(Invisible Women)’에서 구체적인 정책과 제도의 입안과 수립과정도 남성중심의 사고방식과 고정관념에 점령당했다고 했다. 기초자료로 사용되는 통계치들도 ‘여성의 존재’를 간과하는 경우가 허다해 여성이 거기에 있었음조차 무시되곤 한다는 것이다. 교육과정설계, 도시계획입안, 정책수립과정 등에 있어 여성의 시각이 누락되지 않아야 함을 지적하고 있다.

최근 작고한 미연방대법관 긴즈버그(Ruth Bader Ginsburg)가 남긴 일화가 있다. 진보적 성향을 가진 그에게 기자가 물었다. ‘아홉명 정원 대법원에 여성대법관이 몇 명 앉아야 공정한가?’라는 질문에 그는 ‘아홉명 전원’이라고 답했다. 숫자가 문제가 아니라 같은 질문을 뒤집어 ‘아홉명 전원이 남성이라면 같은 질문을 했겠느냐?’고 되묻는다. 남성이 지배하면 당연하고 여성이 들어서면 이상하다 여기는 생각부터 잘못된 것이 아닌가. OECD는 노동임금수준의 성별 간 차이를 발표한다. 회원국들 평균 여성이 남성에 비해 13% 덜 받는다는데, 한국은 단연 그 격차가 추종을 불허하는 1위로 34%나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존재가 되외시될 뿐 아니라 그 가치마저 저평가되고 있음이 아닌가. 남녀 간에 물리적으로 다른 것을 인정하더라도 인격과 인권 면에서 무시되고 소외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교회는 여성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주요교단 하나가 ‘여성이 목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결정했다고 한다. 성경 어느 곳에 남자만 교회를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이 적혀 있는지 모를 일이다. 세상이 저렇게 변했는데, 남자 목사들끼리 모여앉아 저런 결정을 하는 배포가 놀라울 뿐이다. 아니 세상이 변하기 전에 이미 당신들의 대표 선생이었던 바울 사도가 ‘남자와 여자가 예수 안에서 하나임’을 선포하였던 일은 무시해도 되는가. 그런 교회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이 어디로 흩어질 것인지 두렵지도 않은가.

여성 가수 한 사람이 어렵게 어렵게 입을 열었다. 어릴 적에 성폭행을 당했었노라고. 수많은 날들을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지내왔음도 고백했다. 오늘도 폭력 앞에 무너지고 있을 다른 여성들에게 위로가 되고 싶었다고 했다. 세상에 자랑거리가 많아 보이는 나라에서 이 같은 야만이 아직도 존재한다니 경악할 따름이다.

무시당하고 값싸게 취급되며 폭력까지 감내할 양이면, 우리의 누이들에게 이곳은 선진국일 수가 없다. 갈 길이 아직 먼 숙제들은 이제 여성만의 몫이 아니다. 그동안 누리면서도 몰랐거나 무심했던 남성들이 깨어날 차례가 아닌가. 인류의 나머지 절반이 세상을 구할 수 있도록 소매를 걷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