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살로메

이웃분이 이사를 합니다. 집수리까지 마쳤답니다. 한데 깔끔해진 집에, 문짝 내려앉고 손잡이 너덜거리는 장롱뿐 아니라 눈에 띄는 큼직한 세간이라면 허드레라도 다 싸들고 간답니다. 잘 수리된 집과는 어울리지 않는 행보라 다들 눈이 동그래집니다. 몇 십 년 넘은 결혼 생활에 바꿔야 할 세간이 한 둘이겠습니까.

시댁의 눈치 때문이랍니다. 시댁 식구들 집들이를 무사히(?) 끝낸 뒤에 새살림으로 교체할 거랍니다. 듣는 이들 모두 한숨을 쉽니다.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손때 묻은 살림살이에 대한 애잔함 때문이 아니라, 잠깐 눈속임을 위해 덩치 큰 세간들을 이삿짐에 실어야 하다니요.

이게 현실입니다. 아직까지는 그렇습니다. 물론 시댁과의 관계가 물 흐르듯 자연스런 대부분의 집안과는 무관한 이야기입니다. 평소 당당하고 거칠 것 없는 여성이라도, 시댁 문제에 닿으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빚기도 합니다. 새 가구와 최신형 가전제품을 갖춘 집안을 둘러 본 시댁 식구들이 며느리의 헤픈 살림법을 못마땅해 할까봐 미리 방어하는 것이지요. 제 세간 늘린 것과는 반대로 시댁 챙기는 것을 소홀히 했다고 책망 들을까봐 알아서 한 수 접는 것이지요. 시댁에 도리는 다하지 못하면서 제 욕심만 차리는 며느리로 비칠까봐 최대한 소심 모드를 취하는 것이지요. 요모조모 살필 시댁과의 유무언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이중의 노동과 비용이라는 비효율을 감수하는 것이지요.

우리 현실은 여전히 ‘며느리의 도리’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위의 경우 시댁과 며느리 사이에는 외계인과 지구인 사이만큼이나 먼 소통부재의 다리가 놓여 있습니다. 남편도 그 상황을 잘 알고 있지만 적극적으로 개입하지는 못합니다. 시댁과 아내 사이를 조율할만한 근본적인 묘수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속수무책인 채로 강 건너 불구경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남편 마음도 편할 리는 없겠지요. 특별히 별나서가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집안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곤 하니까요. 시댁이 기대하고 요구하는 며느리상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조리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런 집에서는 며느리의 목소리가 커지는 것을 내키지 않아 합니다. 며느리의 역할을 의무를 다하는 데로만 한정 짓고 싶어 합니다.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며느리의 도리를 미덕이나 지혜로 포장하고 추켜세우기를 좋아합니다. 도리란 말의 사전적 의미는 사람이 어떤 입장에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바른길입니다. 그 말이 며느리에게 오면 ‘입장’도 왜곡되고 ‘바른길’도 변형 됩니다. ‘복종과 인내’ 같은 피동적인 의미로 덮어 버립니다. 그리하여 큰 죄 없는 며느리들에게 불필요한 자책감만 키우는 족쇄로 기능할 때가 많습니다.

김살로메소설가
김살로메
소설가

며느리들, 나아가 여성들로 하여금 피해의식을 조장하는 일은 도처에 나타납니다. 어떤 모임에 신입 회원이 들어옵니다. 나름의 자기 의견을 개진합니다. 가부장적 사고의 틀에 갇힌 이들이 보면 그 모습이 영 달갑지 않습니다. ‘시집을 왔으면 시댁의 가풍에 따라야지. 시집온 첫날부터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다’는 핀잔을 듣습니다. 아직도 이런 비유가 횡횡하는 게 우리 현실입니다.

점점 나아지고 있지만, 과도한 자기표현을 하지 않을수록 ‘참한 여자’라는 것을 우리 사회는 무의식중에 세뇌하고 여성들은 세뇌 당합니다. 어디쯤에서 나서고 어디쯤에서 물러서야 하는지에 대해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훨씬 불필요한 감정노동에 시달려야 합니다. 아니, 시달리기를 이 사회가 은근히 강요합니다. 너무 튀어서도 안 되고 부자연스러워서도 안 됩니다. 지키지 못하면 성격이 이상한 여자, 별난 여자로 낙인찍히기도 합니다. 남성 중심적 사고들이 마련해놓은 ‘괜찮은 여자’ 틀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이 사회는 뭉근히 여성들을 억압합니다. 여성들 스스로도 그 사고의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합니다.

많이 좋아졌다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질서는 가부장적 권위에 기댑니다. 혼사를 지낸 경우, 아들이 내 것이기 때문에 며느리도 응당 내 집안사람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가풍을 잇는다는 명목 하에 며느리를 가르침의 대상으로 파악하고 설교하려 듭니다. 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며느리들이 가장 부담스러워 하는 시댁의 요구가 ‘전화 자주해라’ 라는 것이랍니다. 어떤 처가도 사위에게 그런 요구를 하지 않습니다. 어떤 처가도 사위의 도리를 강조하지 않습니다. 맞벌이가 대세인 요즘에도 남성보다는 여성에게 그런 의무가 더 할당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마땅히 그러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 진심에 의해서 몸과 마음은 움직입니다. 아들도 며느리도 내 것이 아닙니다. 그들 스스로의 것일 뿐이지요.

추석이 다가옵니다. 오래된 장롱조차 버리지 못할 만큼 눈치 보는 며느리도, 전화 자주하라는 가르침에 소심해진 며느리도 시댁 가는 발걸음이 가벼웠으면 좋겠습니다. 아직은 먼 그 길, 서로 소통하고 배려하는 그날들이 가까워지기를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