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종 경북대 교수
김규종 경북대 교수

언젠가 솔깃한 말을 듣고 실천에 옮긴 적 있다. 바라는 소원이 있으면, 마음속에 가두지 말고 날마다 글로 쓰라는 것이다. 간절한 소원을 위해 뛰어내리는 ‘와호장룡’과 달리. 혼잣말로 소원하는 것보다 소원을 글로 쓰면 손과 눈과 마음이 함께 움직여서 바라는 바를 이룰 수 있다는 말이다.

소원을 쓰려고 만년필도 사고, 공책도 준비했다. 그날부터 최소 3년 동안 날마다 소원을 썼다. 드물게나마 잊어버린 날이 있지만, 꾸준하고 진지하게 소원을 쓰고 또 썼다.

소원은 소박한 것이었다. ‘세상을 바꾸는 위대한 문필가!’ 고작 12글자로 이루어진 소원을 가졌던 날들을 돌이켜본다. 20대 청춘의 나는,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사람 사는 세상이 돌아와 너와 내가 부둥켜안을 때….”로 시작하는 노래를 즐겨 부르곤 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다시 거침없이 흘러도 검은 머리에 백발 돋아나도 사람 사는 세상은 오지 않았다. 그저 돈 많은 사람 숫자만 늘었을 뿐.

그러던 어느 날, 소원 쓰기를 그만두었다. 그것은 도달할 수 없이 아스라한 저 너머의 신기루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려면 세상이 변해야 한다. 그런 세상은 어느 한두 사람의 노력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왜냐면 변화가 어렵거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정치가들은 언제나 변화와 개혁을 말한다. 하지만 그것이 제대로 이루어진 적은 없다.

변화를 말하는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는 데 문제의 핵심이 있다. 이율배반이다. 나이 먹으면서 깨닫게 된 대목이다. 세상을 향한 손가락질과 비난의 눈길과 매서운 말길을 거두어야 한다는 것! 이토록 자명하고 단순한 이치를 깨우치지 못하고 세상을 원망하고 사람을 한탄하고 시대를 나무랐던 자신에게 되묻는다. “너는 변하고 있는가?!” 고개를 흔들면서 자탄(自嘆)한다.

자신의 정의를 의심하지 않는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자신의 정당성을 믿는 사람은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거처(居處)하는 세상이 불편하지 않은 사람은 돌처럼 굳건하다. 지금과 여기에 만족하는 사람은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의 항상성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가진 것, 지킬 것, 누릴 것 많은 사람은 변화를 싫어한다. 그래서 보수와 수구(守舊)는 변화와 거리를 둔다. 변화는 진보와 혁명의 편에 선 자의 전유물이다.

세상과 다중(多衆)에게 향했던 손가락으로 내 가슴과 머리를 가리키면서 중얼거린다. ‘너는 결코 세상을 바꿀 수 없어!’ 이유는 너무 자명하다. 나는 하나의 타자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고유한 사고방식과 습관과 가치관, 역사의식과 행동방식이 있다. 그것은 석영이나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하게 흉중에 자리한다.

어떻게 바꾸겠는가?! 그것을 바꾼다 해서 전혀 다른 꿈같은 세상이 열리기라도 한단 말인가?!

세상을 바꾸려 했던 시절을 보내니 남은 명제는 단출하다. “그래도 나는 변할 것이다!” 변화를 향한 더운 열망이 오늘도 나를 재촉한다. 벌개미취가 봄처럼 환한 아침나절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