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문화의 상징과 공간
(1) 포항의 노거수와 숲

모감주나무 군락지

지구는 무수한 별 중에 가장 아름답고 생명력이 넘치는 곳이다. 식물이 태초의 불모지에 산소를 공급한 것은 물론, 우리가 먹고 자고 입는 것의 거의 모든 것을 제공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식물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은 이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인류의 정신문화도 식물과 연관된 것이 너무도 많다. 1천년 이상을 살아가는 나무의 생명력을 보고 있노라면 경외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온갖 풍파를 겪으며 오랜 세월을 살아낸 노거수를 마을의 수호신으로 여겼다. 노거수는 단순히 나이가 많은 큰 나무가 아니라 마을의 상징이자 문화의 중심으로 역할을 해온 것이다.

 

푸석한 이암층으로 덮인 영일만 주변, 박정희 前대통령 시절 평지 흙 공수해 나무 식재

물 속에 잠길뻔 한 마북 느티나무는 노거수회가 구해 매년 칠월 칠석에 막걸리 대접

동해 모감주나무군락지 천연기념물 지정… 청하 회화나무, 겸재 정선 화폭에 깃들어

□ 노거수회 출범의 계기

자연환경은 그 땅에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포항의 자연환경은 어떨까? 한마디로 열악한 환경이라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먼저, 우리나라는 편서풍이 주풍인 곳으로, 서쪽에서 비구름이 몰려오는데 포항은 한반도의 동쪽 끝에 위치해 건조한 바람만 오게 된다. 이 때문에 포항은 강수량이 적어 식물이나 사람이 살아가기가 무척 어렵다.

다음은 토양이다. 포항의 토양을 설명하는 좋은 예로 영일만 사방공사가 있다. 1960년대 영일만 주변 산에는 나무를 아무리 심어도 잘 살지 못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칠포에 와보니 산이 온통 이암층으로 덮여있는 게 아닌가. 대기가 건조하면 ‘떡돌’이란 이름처럼 푸석푸석 부서지고, 비가 오면 흙이 씻겨 내려가거나 배수가 되지 않는, 그러면서도 영양가는 거의 없는 토양이었다. 박 전 대통령이 해병대를 동원해 산에 교통호처럼 땅을 파게 하고는 평지에서 좋은 흙을 지게에 짊어지고 와서 나무를 심게 했다. 3년간 30만 명의 인원이 투입되었다.

이후 30년이 지나 큰 산불로 이 일대 나무가 모두 불탄 후 몇 년이 지나도 숲이 형성되지 않고 맨땅이 드러나 있었다. 이에 포항시와 산림청은 이곳을 사방기념공원으로 만들어 과거 역사를 교육하는 장소로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니 포항사람들은 한 그루의 나무도 소홀히 다룰 수 없게 되었고, 노거수회가 포항에서 처음 출범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마북 느티나무
마북 느티나무

□ 무자천손의 마북 느티나무

신광면 마북 저수지 옆에 느티나무 할아버지가 살고 있다. 이 할아버지는 경상북도 지정 보호수 제1호로 ‘권씨 할배나무’라 불리며 매년 정월 대보름 동제를 지냈던 당산나무이다. 1993년부터 포항의 극심한 가뭄으로 마북 저수지 확장 계획이 결정되었다. 이 공사가 진행되면 느티나무는 물에 잠기게 될 처지에 놓이게 되었고, 노거수회는 느티나무 구명 운동을 펼쳤다. 다행히 4억5천만 원의 예산을 확보해 3년간 뿌리돌림 후 1999년 3월 9일 원래 있던 곳에서 200m 떨어진 남쪽 산기슭으로 옮기게 되었다.

느티나무는 이 마을 안동 권씨 입향조와 관련해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무자천손(無子千孫)’으로 ‘아들은 없고, 손자가 천명’ 또는 ‘아들은 없지만, 자손은 천대를 잇는다’란 내용이다. 옛날 어느 해, 큰 홍수가 나서 온갖 나무들이 뿌리째 뽑혀 물살에 휩쓸려 내려갔다. 그런데 수형이 반듯한 어린 느티나무 한 그루는 센 물살에 넘어지지 않고 꼿꼿이 선 채 떠내려왔다. 이를 본 입향조 권씨가 어린나무를 건져 소반 위에 얹어서 방안에 두었다. 흙도 없고 물도 주지 않았는데 한 달이 지나도 죽지 않기에 집안 뜰에 심게 되었다. 나무가 점점 자라 집안에 둘 수 없어 마을 입구에 옮겨 심었다.

자식이 없던 입향조 권씨는 친자식 대하듯 돌보았고 이런 정성 덕분에 나무는 쑥쑥 자라 늠름한 모습이 되었을 때쯤 권씨는 병으로 앓아누웠다. “내 죽거든 저 나무를 나로 알고 박주일배(薄酒一杯)를 쳐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또 권씨의 무덤자리를 정한 풍수가 무자천손 터라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이 나무는 커갈수록 다섯 가지가 동서남북과 중앙을 가리키듯 반듯하게 자라 마을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주었고 권씨 유언대로 절을 받는 당산나무가 되었다.

홍수에 떠내려가던 나무를 입향조 권씨가 살려주었고, 다시 물속에 잠길 운명에 있는 나무를 노거수회가 구한 것이다. 이후 노거수회에서는 매년 칠월 칠석에 이 느티나무와 만남의 날 행사를 갖고, 손자 손녀의 마음으로 막걸리를 대접하며 천수를 누리길 기원하고 있다.

 

흥해민속박물관 회화나무
흥해민속박물관 회화나무

□ 흥해를 살린 회화나무

흥해읍 성내리 흥해민속박물관 뜰에는 수령이 600년, 둘레가 6.5m나 되는 늠름한 회화나무가 서 있다. 이 나무는 흥해의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다. 조선시대 풍수가였던 이성지가 비학산 정상에 올라 흥해 분지를 바라보고 “흥해는 다풍질(多風疾)이어서 후손이 5대 이상 살 곳이 못된다.”고 하였다. 그 이유로 “흥해는 과거 큰 호수였던 곳으로 가뭄 걱정은 없으나 습기가 너무 많아 필시 괴질병이 창궐할 것이다.”라는 것이다. 그는 이를 해결할 방법으로 집집마다 회화나무를 많이 심어 지하의 습기를 제거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흥해군수는 집집마다 회화나무 심기를 권장하였고, 이후 흥해는 물 좋고 농사도 잘 돼 사람 살기에 좋은 곳이 되었다고 한다.

풍수가 이성지의 안목도 뛰어나지만 이를 허투루 듣지 않고 실행에 옮긴 군수의 실행력도 본받을 만하다. 흥해 곳곳에는 회화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는데 건강상태가 좋지 않다. 보호수로 지정돼 있는 흥해 민속박물관의 회화나무뿐 아니라 이곳을 옥토로 바꾼 다른 주인공들에게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 하늘이 내린 선물, 모감주나무

6월 중순, 무더위에 지친 사람들에게 황금색 꽃이 피어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그 주인공인 모감주나무는 세계적 희귀종으로 국내에서도 자생지가 몇 곳 되지 않는다. 포항은 우리나라 최대의 모감주나무 자생지로, 특히 동해면 발산리의 모감주나무 군락지는 생태적·학술적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 제371호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포항의 천연기념물은 모감주나무 군락지를 포함해 흥해 달전리 주상절리, 흥해 북송리 북천수(숲), 장기 뇌성산 뇌록산지 등 4곳이 있다.

모감주나무는 큰 나무이면서 화려한 꽃을 피우는 몇 되지 않는 나무이다. 꽃 하나하나는 작지만 원추꽃차례로 달린 꽃들은 은은한 향기와 함께 벌들의 합창까지 들려준다. 곧이어 꽃이 싱그러운 채로 뚝 떨어지는데, 이를 서양에서는 골든 레인 트리(Golden rain tree)라 부른다. 노란꽃을 떨구자마자 꽈리를 닮은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아 보는 이의 마음을 풍성하게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씨앗으로 염주를 만들어 염주나무라고도 하고, 중국에서는 학자나 선비의 묘에 심는 나무라 해서 학자수, 선비수라 한다. 공자의 묘소에도 아름드리 모감주나무 두 그루가 있다고 한다.

 

여인의 숲
여인의 숲

□ 명성을 되찾아야 할 장기숲

장기숲은 신라시대부터 길이가 10리, 폭이 5리나 되는 큰 숲으로 ‘십리장림임중숲’으로 불렸다. 1967년 농토로 개간하면서 대부분 벌채되고 지금은 장기중학교 안팎에 느티나무, 이팝나무, 회화나무 몇 그루만 남아 있다. 숲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예전 장기고을 원님은 주변 고을의 원님들에게 장기숲 자랑만 하다가 재임 기간을 마치고 갔다는 말이 전해진다.

장기숲에는 다른 숲에 없는 특별한 수종이 있었다고 하는데, 탱자나무, 주엽나무, 시무나무 등 가시가 많은 나무이다. 가시 많은 나무를 심은 이유는 장기 뇌성산에 있는 뇌록(磊綠) 때문이라고 한다. 뇌록은 단청에서 옥색을 만들기 위해 가장 많이 사용되는 초록색 암석으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이곳에서만 난다. 왜구가 이것을 확보하기 위해 자꾸 침입하자 거대한 방책으로 조성한 것이 장기숲이다. 지금도 장기중학교 안에는 100년 이상 된 아름드리 주엽나무가 있다.

장기는 다산 정약용, 우암 송시열 등의 유배지로 학문의 수준이 매우 높았다. 이들이 장기숲을 거닐며 유배의 설움을 달래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장기초등학교 교정에는 우암이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서 있다. 이렇게 훌륭한 역사를 간직한 장기숲을 복원해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남아 있다.

□ 김설보 여사의 숭고한 뜻이 서려 있는 ‘여인의 숲’

포항시 북구 송라면 하송리에는 한 여인의 정성으로 조성된 울창한 상수리나무 숲이 있다. 1992년 노거수회 이삼우 회장이 이 숲의 가치를 발굴해 ‘여인의 숲’이라 이름 짓고 2011년 생명의 숲, 산림청, 유한킴벌리가 공동으로 주최한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 공모해 공존상을 받았다. 예전에 이곳에서 주막을 하던 김설보 여사가 땅을 사서 참나무 숲을 조성하였다. 이후에 큰 홍수가 났는데 이 숲 덕분에 많은 인명과 가축, 그리고 추수해놓은 곡식을 구할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감사비를 세우고 이 숲을 ‘식생이수(食生而藪)’라 불렀다. 예전에는 숲의 규모가 얼마나 컸던지 숲에 들어선 아이들이 길을 잃을 정도였다고 하나 일제강점기부터 주택과 논이 야금야금 침범해 지금은 자그마한 숲으로 남아 있다. 2003년 노거수회의 제안과 포항시의 지원으로 ‘여인의 비’를 건립했다. 김설보 여사야말로 장지오노의 소설 ‘나무를 심은 사람’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 겸재 정선의 회화나무와 소나무

겸재 정선이 청하현감으로 부임하던 중 국보 217호인 ‘금강전도’를 완성하고, ‘내연산삼용추도’와 ‘고사의송관란도’, ‘청하읍성도’를 남겼다. ‘내연산삼용추도’의 모델인 연산폭포와 관음폭포는 어느 명소에 비해도 뒤지지 않을 절경이다. ‘고사의송관란도’의 소나무는 바위 절벽인 비하대에 굽어자란 소나무가 모델인 것으로 추정돼 ‘겸재송’이라 부르고 있다. 조감기법으로 그린 ‘청하읍성도’의 큰 나무는 현재 청하면사무소 뜰에 있는 회화나무와 일치하는 것으로 보여 보존 가치가 매우 높다. 청하읍성의 복원과 더불어 이 회화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면 포항의 자랑이 될 것이다. <사진/안성용>

 

글/ 강기호

서울대 산림자원학과 및 동 대학원 석사 졸업. 영남대 조경학과 박사. 현재 국립백두대간수목원 백두대간보전부장 근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