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끄-루이 다비드의 대표작 ‘호라티우스 형제들의 맹세’.

1750년을 전후로 서양미술사에서는 신고전주의 양식이 나타나 프랑스 혁명기 동안 전유럽에서 유행했다. 신고전주의는 앞선 바로크와 로코코의 현학적인 기교에 대한 미학적 반발로 등장하면서 고대, 특히 고대 로마 미술에서와 같이 형식과 내용의 통일성과 명료성을 강조했다.

신고전주의가 유럽 전역에 급속히 확산 되는데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수백 년 동안 화산재 속에 덮여 있던 고대도시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의 발굴이다. 고대의 정신을 이상적 가치로 여기던 유럽인들에게 고고학적 발굴로 옛 도시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으니 그 흥분이 어떠했을지 충분히 예측된다. 많은 유럽인들이 상상으로만 그리던 고대 도시의 모습을 직접 경험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향했고, 부유한 영국인들 사이에서는 유서 깊은 도시를 방문해 그곳의 문화와 역사를 현장에서 체험하고 익히는 이른바 그랜드 투어가 유행했다. 지적 호기심에 가득찬 여행객들 중에는 당연히 미술가들도 포함돼 있었다. 미술가들은 눈앞에 펼쳐진 고대의 생생한 모습을 그림으로 담아 판매했고, 타국에서 몰려온 여행자들은 현장의 감동을 오래도록 간직할 목적으로 그림을 구매해 집으로 돌아갔다. 이처럼 고대에 대한 지적 호기심의 고조가 신고전주의 양식이 급속히 전파되는데 적잖은 역할을 했다. 신고전주의는 고대를 모범으로 삼았지만 신고전주의가 발달한 것은 이탈리아가 아니라 프랑스였다. 유럽 다른 나라들과 비교했을 때 프랑스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국가주도의 체계적인 미술교육이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바로크적 미술 취향을 밀어내고 신고전주의가 싹을 틔운 것은 18세기 중반이다. 이 양식이 번창했던 것은 초기 혁명기에서부터 나폴레옹 시대까지 다다르는데, 1800년경 낭만주의 미술과 일정 기간 공존하다 서서히 사라졌다.

신고전주의 미술을 이끌었던 가장 대표적인 미술가는 자끄-루이 다비드(1748∼1825)라는 인물이다. 위풍당당 말을 타고 ‘알프스를 넘어가는 나폴레옹’(1801년)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나,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성대히 거행된 ‘나폴레옹의 대관식’(1806년) 장면을 담은 그림이 바로 그의 대표작이다.

다비드는 프랑스 왕립미술학교에서 그림을 배웠는데, 당시에는 귀족들의 유희와 쾌락이 강조된 장식성 짙은 로코코 양식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시대적 유행과는 달리 다비드는 신고전주의 양식을 발달시킨 선구자 조셉-마리 비엥(1716∼1809)에게서 그림을 배웠다. 1648년 루이 14세의 명으로 문을 연 프랑스 왕립미술학교는 해마다 각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학생들을 선발해 로마로 국비유학을 보내주는 ‘로마 대상’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자끄-루이 다비드는 1774년 명예로운 로마 대상을 수상해 1775년부터 1780년까지 로마에 머물며 이탈리아 거장들의 미술은 물론 고대에 대한 식견을 넓힐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로마로 유학을 떠난 다비드는 이제 막 발굴되기 시작해 지식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던 폼페이를 방문해 고대 유물들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었다. 폼페이에서의 경험은 훗날 다비드가 신고전주의 양식 최고의 대가로 성장하는데 중요한 밑거름이 됐다.

로마 유학을 마치고 파리로 돌아온 다비드는 프랑스 왕실로부터 한 점의 그림을 주문 받았고, 그렇게 그려진 그림이 루브르가 소장하고 있는 다비드의 대표작 ‘호라티우스 형제들의 맹세’(1784년)이다. 고전미술을 모범으로 내용과 형식에서 명료함과 통일성을 완벽에 가깝게 구현한 다비드의 그림은 1785년 파리의 살롱전에 소개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한 점의 그림으로 자끄-루이 다비드는 단숨에 프랑스 미술계 일약 스타로 급부상했다. 고대로마의 역사가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 그리고 리비우스의 ‘로마사’에 묘사된 한 장면을 그리고 있는 ‘호라티우스 형제들의 맹세’는 화가 다비드의 출세작임과 동시에 바로크가 막을 내리고 신고전주의라고 하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중요한 걸작이다. /미술사학자 김석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