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혜씨의 냉장고에서 나온 봉지들.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었다. 주방에서만 걸음이 늦었던 나는 대단한 결심을 하였다. 바쁘다는 핑계로, 아이들이 집을 떠나 있다는, 회식이 잦은 남편 때문에 한걸음 뒤에 두었던 냉장고를 털기로 했다.

앞치마를 두르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채소 칸에 쟁여 놓은 한 보따리의 욕심이 가득하다. 싱싱하다 싶으면 사고 일대일 행사제품을 보면 왠지 남는 장사라 싶어서 산 것이다. 비닐에 싸인 봉지를 꺼내 식탁에 쌓았다. 쿰쿰한 냄새를 품은 봉지가 식탁에 가득하다. 한 봉지를 열어 보니 호박들이 뒤엉키고 짓물러 서로 붙어 있다. 겨우 하나를 살리고 나머지는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렸다. 물러진 대파와 양파, 버섯은 그들이 갉아 먹은 시간을 갈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채소 칸을 비워 햇볕에 말리니 내 마음에 윤이 났다. 하나 남은 호박을 씻어 놓으니 참 매끈하다. 물러진 양파는 한 귀퉁이를 잘라 투명한 통에 넣었다. 내일이면 이 녀석들은 된장찌개에 들어가 통렬한 최후를 맞이할 것이다. 내친김에 냉동실도 열었다. 내용물을 알 수 없는 봉지가 칸칸이 가득하다. 말끔해진 식탁 위에 또다시 얼음덩이가 하나 둘 쌓였다. 봉지를 열어 보니 봄에 데쳐 물과 함께 넣었던 나물이, 지난겨울에 지인이 국산이라고 주었던 고사리가 보였다. 고등어와 오징어 가자미 등 생선이 꼬리를 물고 나왔다.

정리정돈의 첫 단계는 버리기다. 그다음에는 공간의 재배치이다. 그래서 나는 냉장고 문을 다시 열었다. 비웠으니 한눈에 볼 수 있게 반찬들을 배치했다. 자주 사용하는 것들을 앞에 놓고 장류와 양념 통은 냉장고 안쪽에 두었다.

냉장고 털기는 마음이 가벼워지는 나의 훈련이다. 정리정돈에 약한 내가 정기적으로 치러야 하는 의식 같은 것이다.

/이순혜(포항시 남구 효자풍림아이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