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휘 논설위원
안재휘 논설위원

바둑판 격언 중에 ‘기자쟁선(棄子爭先)’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돌 몇 점을 희생시키더라도 선수(先手)를 잡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하수는 돌을 아끼고 상수는 돌을 버린다’는 속담도 있다. 바둑판에서는 초심자일수록 자기편 돌은 하나라도 죽이지 않으려고 애쓴다. 그러나 고수는 사석작전(捨石作戰)에 능하다. ‘버림돌’을 잘 써야 고수다.

‘내 살을 내어주고 상대의 뼈를 자른다’는 뜻인 육참골단(肉斬骨斷)은 일본 사무라이들의 세계에서 하수가 고수를 상대할 때 쓰는 비법으로 통한다. 변화무쌍한 정치권의 쟁패에도 이 작전은 왕왕 구사된다.

연초부터 본격적으로 불붙기 시작한 추미애 법무부 장관 아들의 병역논란이 도무지 종식될 기미가 없다.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이 적극적인 반격을 개시했다.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2건의 ‘추 장관 탄핵’ 국민청원에 각각 24만여 명, 21만여 명의 동의를 얻으며 답변 요건을 충족하자 청와대는 이례적으로 조목조목 반박하고 나섰다.

국방부의 급변이 특히 눈에 띈다. 국방부는 관련 규정들을 구구히 들며 전화로 휴가 연장한 추 장관 아들의 휴가 연장 절차에 하자가 없다는 해석을 내놨다.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 휴가연장 명령서나 청탁 전화 등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그나마 국방부의 해명이 민주당과의 협의 절차를 거쳐서 작성되고 공유됐다는 사실이 드러나 파문이 일고 있다.

추 장관 아들 측의 법적 대응도 주목거리다. 추 장관 아들 서모 씨 군부대 배치 청탁 의혹을 보도한 SBS와 소속 기자를 형사 고발한 데 대해서는 한국기자협회 등 언론 3단체가 ‘언론 길들이기’라는 비판과 함께 고발 철회를 촉구했다.

정부와 민주당의 반격에도 불구하고 추 장관 아들의 ‘황제 휴가’ 논란에 대한 국민 정서는 험악하다. ‘병역’이라는 민심의 역린을 건드린 일이어서 갈수록 고약해질 공산이 크다. 정치인들이 정치적 해법은 도외시한 채 스스로 판검사 밑으로 기어드는 현상은 우리 정치의 천박성을 상징한다.

드디어, 정권이 추미애 장관을 ‘사석(捨石)’으로 놓고 게임을 벌이고 있는 게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기 시작했다. 조국 사태 때도 그랬지만, 팬덤이 지배하는 돌연변이 정치풍토 속에서 온 나라가 난리를 쳐도 거시적 계산법으로는 ‘총알받이’를 장기간 두는 것 자체가 하나의 전략일 수 있다. 야권은 지금 ‘전술’에서는 이기고 ‘전략’에서는 지는 게임을 벌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헐벗은 경제도, 조국도, 윤미향도, 윤석열의 위기도 잊히고 있다. 윤영찬도 곧 잊혀질지 모른다.

무능한 정권에 대해 ‘퇴진’을 요구하는 제2의 촛불 민심은 ‘코로나19’가 대신 막아주고 있으니 문재인 정권은 참 복도 많다. 적지 않은 국민이 선동 장난질에 부화뇌동하고 선심 정책에 휘둘리는 수준에 머무는 현실은 참으로 기막힌 노릇이다. ‘깨어있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했던가. 독재 타도를 위해 평생을 뜨겁게 살다 간 고(故) 함석헌 선생의 말이 다시 새록새록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