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
14 황룡사지

553년 처음으로 건립되기 시작해 진흥왕, 진평왕, 진지왕, 선덕여왕에 이르기까지 4대 93년 만에 완공된 신라 최고의 사찰인 황룡사 절터의 모습.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이 황룡사 역사문화관이다. /이용선기자photokid@kbmaeil.com

인간의 상상력은 한계와 끝이 없다고 말하지만, 그건 오만이나 착각일 수 있다.

상상이 구체화되기 힘든 아주 오래된 사건이나 1천400여 년 전 까마득한 풍경 앞에서는 사람이 가진 상상의 힘이 무너지거나 무력화될 수도 있지 않을까?

매번 신라의 고대 유적과 유물을 만날 때면 위와 같은 의문을 가졌다. 경주를 여행한다는 건 스스로의 상상력이 얼마나 큰 영역 안에서 작동하는지를 가늠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4명의 왕이 93년에 걸쳐 만들어낸 사찰, 80m 높이의 거대한 목탑이 우뚝 서있던 공간, 서라벌 사람들의 정신적 버팀목 역할을 했던 황룡사 또한 우리들 상상력의 한계를 위협한다. 머릿속에서도 쉽게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것.

바로 그 황룡사가 있었다고 추정되는 경주시 구황동 황룡사지(사적 제6호)를 찾은 날은 잠시 소강상태였던 ‘코로나19 사태’가 재발한 시기였다. 당연지사 관광객이 눈에 띄게 줄어든 상태.

중년의 아버지와 20대 초반의 딸을 제외하고는 황룡사지를 거니는 여행자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주위가 조용했다. 그래서였을까. 발굴의 흔적이 곳곳에 남은 거기선 상상력의 날개가 더 크게 펼쳐졌다. 황룡사는 대체 어떤 가람이었을까?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이 발행한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제20권 ‘신라의 유적과 유물’이 사람들의 의문에 이런 답을 들려주고 있다.

“황룡사는 진흥왕 14년(553년)에 월성의 동쪽에 새로운 궁궐을 짓다가 그곳에서 황룡이 승천하는 모습을 보고 사찰로 짓게 하여 이름을 황룡사(黃龍寺)라고 하였다. 착공 후 17년 만에 완성하여 다시 황룡사(皇龍寺)로 고쳤다. 그리고 사찰이 완성되고 5년 후 진흥왕 35년(574년)에 주존불(主尊佛)을 비롯하여 금동삼존불인 장육존상을 만들고, 진평왕 6년(584년)에 10년의 세월이 걸려 금당을 지어 모셨다. 이후 선덕여왕은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온 자장율사의 권유로 645년에 구층 목탑을 세웠으며…(하략)”

 

4명의 왕이 93년 만에 완성한
신라시대 최대의 사찰 ‘황룡사’
높이 80m의 황룡사 구층목탑
몽골의 침입으로 불타버리고
광활한 절터 흔적만 덩그러니

 

황룡사 역사문화관에는 황룡사 구층 목탑을 1/10 크기로 재현한 모형탑이 전시되어 있다.  /경북매일 DB
황룡사 역사문화관에는 황룡사 구층 목탑을 1/10 크기로 재현한 모형탑이 전시되어 있다. /경북매일 DB

◆ 한 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웅장한 사찰을 상상하다

황룡사 조성은 6세기 중반에 시작돼 7세기까지 이어진 ‘서라벌의 초대형 프로젝트’였다. 규모가 컸음은 물론이고, 거기서 파생된 예술적 성취도 대단했다.

공사엔 수천 명의 석공(石工)과 목공(木工)이 동원됐고, 심지어 갈등하고 대립하던 백제에서 일류 목공까지 모셔와 목탑 축조의 감독을 맡겼다. 신라 왕실의 자존심이 걸린 일이었기 때문이다. 100년 가까운 시간이 걸려 마침내 황룡사와 목탑이 모두 완성됐을 무렵의 서라벌을 상상해봤다. 미려한 건물들과 하늘을 뚫을 듯 웅장하게 솟아오른 구층 목탑. 거기에 수백 명 승려들의 예불 소리…. 재론의 여지없이 장관이었을 게 분명하다.

앞서 언급한 책 ‘신라의 유적과 유물’은 당시 황룡사가 가졌던 위상을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553년 처음으로 건립되기 시작한 황룡사는 선덕여왕 14년(645년)에 목탑이 완성될 때까지 진흥왕, 진평왕, 진지왕, 선덕여왕에 이르기까지 4대 93년 만에 완공된 신라 최고의 사찰이었으며, 신라 삼보(新羅三寶·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3가지 보물) 중에서 장육존상과 구층 목탑을 간직한 국찰(國刹·국가가 창건해 운영한 절)이었다. 신라가 멸망한 후 1012년엔 조유궁을 헐어 그 재목으로 구층 목탑을 수리하기도 했다. 하지만, 1238년 몽골의 침입을 받아 불타버리는 비운을 맞았다.”

나무는 재료의 특성상 돌처럼 견고하지 못하다. 역사에서 가정(假定)이란 무용한 일. 그러나, 이런 상상을 해본다. 만약 황룡사와 구층 목탑이 목조가 아닌 석조 건축물이었다면 어땠을까? 끔찍한 화마(火魔)에 사라지지 않고, 세월의 파도를 이겨내며 지금도 그 모습이 제대로 남아있다면…. 아마도 중세 이탈리아 성당이나 캄보디아의 앙코르 와트(Angkor Wat) 이상으로 미려함을 인정받는 세계적 관광유적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이 거기에 이르니 이 땅을 유린한 800년 전 몽골 군대가 미워졌다.
 

◆ 오래된 절터에서 미당(未堂)의 시를 떠올리다

형상은 사라져도 기억은 남는다. 역사적 상상력이 그 기억의 복원에 힘을 더해준다. 황룡사는 1천400년 전에 만들어져, 까마득한 옛날인 고려 시대 때 사라진 사찰이다. 생존한 누구도 본 적이 없다. 그렇다 해도 한 민족의 기억 속에서 그들의 자부심이나 자랑거리를 온전히 사라지게 만들 수는 없는 법. 황룡사 발굴 작업은 상상력 저편 기억으로 남은 서라벌의 역사를 복원하는 행위다. 그래서 의미가 작지 않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1976년부터 8년 간 황룡사지 일대 8만928㎡의 땅에서 발굴 조사를 벌였다. 사찰 배치의 전모를 밝히고, 발굴된 자료를 토대로 절터를 정비·보존해 역사 교육에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이 작업을 통해 수만 점의 유물이 세상에 드러났고, 황룡사 구조와 내부 건물의 배치가 많은 부분 확인됐다. 출토된 연화하대석, 간주석, 초석 등은 현장에 전시돼 그곳을 찾는 사람들과 반갑게 만나고 있다.

2020년 오늘. 완전한 형태의 황룡사와 구층 목탑을 볼 수는 없지만, 학자들의 노력이 ‘상상 속의 7세기 신라’를 보다 뚜렷하게 만들어주고 있다는 건 분명하다. 절터를 느린 걸음으로 돌아보며 그 옛날 황룡사를 찾았을 진흥왕과 선덕여왕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때 떠오른 시 한 편이 있었으니 서정주(1915~2000)의 ‘선운사 동구(禪雲寺 洞口)’. 이런 노래다.

선운사 고랑으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오히려 남았습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디다.

동백꽃을 보러 고향 가까운 절을 찾아간 시인. 정작 보고자 했던 꽃은 보지 못하고 주모의 잡스럽고 속된 노래만 듣고 돌아와야 할 난처한 형편이다. 그러나, 이 시에선 실망보다는 낭만이 더 크게 일렁이고 있는 게 보인다.

‘동백꽃’으로 상징되는 성(聖)과 ‘육자배기’로 표현된 속(俗)이 결국은 멀리 있지 않다는 문학적 깨달음이 작가에게서 독자에게로 자연스레 전달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황룡사 역사문화관의 신라역사전시실에 전시 중인 각종 유물. /경북매일 DB
황룡사 역사문화관의 신라역사전시실에 전시 중인 각종 유물. /경북매일 DB

◆ 황룡사역사문화관이 다시 문 여는 날을 기다리며

미당이 동백꽃을 보러 선운사에 갔다면, 기자는 황룡사지와 함께 황룡사역사문화관을 보기 위해 경주행 버스를 탔다. 황룡사 발굴 현장에 지어진 황룡사역사문화관은 어떤 곳일까? 경주시 문화관광 홈페이지에 간략한 정보가 실려 있다.

“신라왕경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발굴 조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는 황룡사지 바로 옆에 건립된 전시관이다. 황룡사지의 연구 및 발굴 조사 성과를 국민과 공유하기 위해 마련됐다. 황룡사 건립부터 소실까지의 과정을 담은 3D영상 시청각실과 발굴 조사 과정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한 신라역사전시실 등으로 이루어졌고, 황룡사 구층 목탑을 1/10 크기로 재현한 모형탑도 전시돼 있다.”

우리는 올해를 ‘갑작스레 출현한 바이러스가 인간의 생존을 위협한 고약한 시절’로 기억할 듯하다. 안타깝게도 황룡사역사문화관은 임시 휴관 중이었다.

역사문화관 통유리를 통해 손에 잡힐 것 같은 황룡사 구층 목탑 모형을 바라보며, ‘코로나19 종식’ 이후를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큰일이었다. 서정주에겐 ‘동백꽃’을 대신할 ‘막걸릿집’과 ‘육자배기’가 있었지만, 기자에겐 그게 없었던 것.

그래서다. 한참을 더 황룡사지에 머물며 저 먼 6~7세기 서라벌과 그 시대를 살았던 신라인들을 상상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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