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규열 한동대 교수
장규열 한동대 교수

현실은 늘 못마땅하다. 세상은 언제나 불공평하다. 삶은 날마다 버겁다. 허덕이며 지나는 모든 질곡은 광야가 아닌가. 시인 이육사(李陸史)는 그래서 백마를 타고오는 초인을 기다렸을까. 보통사람들은 그래도 삶이 조금이라도 나아지라고 때마다 표를 던진다. 기대만큼 일상이 호전되지 않아 기대는 다시 실망이 된다. 하필 감염병이 돌아 행동도 자유롭지 못한데 뜬금없는 ‘일등’소리를 듣는다. 일등은 과연 초인이었을까. 당신이 아니면 세상은 하염없는 나락을 헤맬 것인가. 일등만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

한때는 그랬다. 아니 그래 보였다. 뛰어난 지력이 놀라운 성장과 함께 성취에 이르면 눈부신 열매도 거두는 듯하였다. 세간의 관심이 먹고사는 데에 머무는 동안 세상의 일등들이 이끌어 여기까지 온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허세와 과장도 결과를 보면서 용인하였다. 그늘에서 이름없이 도왔던 손길들도 그들의 출중함을 탓하지 않았다. 부럽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지만, 자신들도 묵묵히 일로 보여주므로 공연히 시비하지 않았다. 너무 오래 그래 왔을까. 급기야 일등들이 스스로 ‘일등만 해야한다’고 주장하는가 싶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다.

자만은 위험하다. 자신을 세상보다 높은 자리에 올린다. 더 배우거나 깨우칠 필요가 없다고 여긴다. 현실에 안주하여 생각할 필요를 막아버린다. 더 배우지 않게 하고 상상력을 차단하며 남과 함께 하는 협력의 창을 닫아 버린다. 고대 그리스의 시인 테오그니스는 ‘신은 세상에서 없애버리고 싶은 사람에게 자만심을 선물로 준다’고 하였다. 세상도 바뀌었다. 일등을 조건없이 인정하고 순순히 따르는 사람은 이제 없다. 당신에게서 진정성과 공감능력을 확인해야 한다. 세상은 일등의 자만심에 기대지 않는다.

사학자 아놀드 토인비(Arnold Toynbee)는 역사 가운데 위기에 봉착했던 인류를 ‘창조적 소수자들(Creative minories)이 구해왔다’고 하였다. 광야에서 달려오는 어느 초인이나 일등의 기억만 고집하는 수재들이 아니라 공동체의 미래를 놓고 함께 공감하며 걱정하는 집단지성을 의미하였다. 인류문명은 외부의 공격에 무너지는 게 아니라 내부의 몰락으로 붕괴한다고 하였다. 우리 내부의 일그러진 모습을 직시하는 창조적 소수자들이 움직일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이념에 기초한 편 가르기에 몰두해서 될 일이 아니다.

일등만 바라보는 세상이 아니다. 초인을 기다리는 국민도 없다. 함께 어우러지며 더 나은 내일을 열어가야 한다. 둔하고 더디어 굼뜨게 행동하는 인간이 인류의 위기를 이제는 절감하며 움직여 가도록 코로나19가 온 게 아닐까. 시대의 지성과 보편적 양심이 깨어나도록 재촉하고 있다. 어떻게 가야 할지는 모두에게 달렸다. 앞에 선 몇 사람에게 재촉할 일이 아니다. 애를 안 쓰는 것도 아닌데, 우리는 어째서 편만 가르고 있는 것일까.

누구를 기대할 것인가. 무엇을 기다릴 것인가. 세상은 바꾸어보라고 아우성을 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