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만난 세월이 얼만데! 상대와의 관계가 얼마나 돈독한가를 증명해보이고 싶을 때 흔히 하는 말입니다. 오랜 기간 만나왔으니 그 우정의 깊이는 재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시간과 우정이 꼭 비례하는 건 아닙니다. 학창 시절 친구가 아무리 좋다 해도 서로 도움 주는 이웃만 못하고, 직장 동료와 종일토록 붙어 있다고 해도 마음 먼저 닿는 먼 친구만 못합니다. 한마디로 때와 장소 등 물리적 요인은 관계를 규정하는 절대적인 잣대가 되지는 않습니다. 오래 알아왔다고 우정이 깊은 것도, 자주 만나는 사이라고 절친이 되는 것은 아니지요. 공감보다 나은 친구는 없고 마음보다 앞선 우정은 없을 테니까요. 진심이 통할 때 우정은 지속됩니다.

온라인에서 알게 된 친구들이 있습니다. 다섯을 묶은 출발점은 ‘책’입니다. 어느 날부터 자연스레 의기투합하여 비정기적으로 만남을 가져왔습니다. 일부러 그렇게 모이기도 힘들 텐데 다섯 친구들은 운명처럼 전국에 골고루 흩어져 삽니다. 대전, 청주, 광주, 포항, 부산. 각자 뚜렷한 개성을 지녀 한 번만 만나도 어떤 성격인지 알 정도입니다.

좋은 날 불쑥 각자 기차를 타고 청주나 부산 또는 경주나 대전 그리고 광주 어디쯤에 모여 점심을 함께 하며 수다를 떱니다. 읽은 책을 화제 삼고 가진 책을 나누며, 잘 쓴 작가를 부러워하고 읽고 싶은 책 목록을 공유하기도 합니다. 물론 고상한 척 책 이야기만 하는 건 아닙니다. 자식 걱정이나 자랑도 하고, 남편 흉이나 장점도 나눕니다. 각자의 회한도 돌이켜보고 앞일을 가늠해보기도 합니다. 주어진 하루가 짧다는 걸 알아서일까요. 오래 만나온 사람들이 나누는 것 이상으로 인간사 희로애락을 그토록 짧은 시간에 술술 풀어내곤 합니다.

이 매혹적인 모임은 한 친구 덕에 가능했습니다. 어떤 방해꾼도 없는 온전한 한나절의 해방구는 그녀의 기획 작품인 셈이지요. 열정과 선함이 몸에 밴 그 친구는 나머지 네 명을 적극적으로 아우르고 배려하고 챙깁니다. 우리는 그녀를 신뢰하고 따릅니다. 그녀가 마련한 멍석 마당에 자유롭게 퍼질러 앉아 수다 떨고 웃기만 하면 됩니다. 책과 사람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그녀에게 저는 ‘다정도 병’이라는 별명을 지어줬습니다. 그토록 다감하고 그토록 솔직하며 그토록 열정적인 친구를 일찍이 본 적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렇게 모임을 이끌던 친구가 멀리 떠나게 되었습니다. 미국인 남편을 따라 LA로 가게 되었지요. 환송회가 있던 날 키 크고 잘생긴데다 착하기까지 한 그녀의 남편 뢉이 갑자기 나타났습니다. 양손엔 다섯 점의 그림이 들려져 있었습니다. 예술을 전공한 뢉이 아내와 그 친구들을 위해 몇날 며칠 이별 선물을 준비한 것이지요. 아무도 생각지 못한 깜짝 쇼였습니다. 안타까움으로 허해진 가슴에 훈풍이 깃들었고, 순식간에 눈물바다가 됐습니다. 아쉬움과 감동이 교차하던 시간이었습니다.

미국에 정착한 그녀는 새로이 간호학에 도전했습니다. 기전공인 패션과는 너무 먼 방향이라 의아했지만 그녀의 열정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얘기였지요. 공부엔 나이가 없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몇 년 만에 드디어 학위를 받게 됩니다. 내친 김에 대학원에도 진학해 학계에 남고 싶어 합니다. 긍정적 마인드로 앞을 향해가는 그녀의 성정을 알기에 그것 역시 어려운 고지가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취미이자 특기인 공부에 매진하는 그녀가 경이롭기만 합니다.

바쁜 와중에도 그녀는 친구들의 생일이나 경조사 등을 챙깁니다. 그녀를 알게 된 후, 받는 데만 익숙했지 뭔가를 제대로 줘 본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그녀보다 한 발 늦습니다. 이번엔 큰 맘 먹고 한 발 앞서보기로 했습니다. 간호사 면허 취득 축하겸 생일 축하를 해주고 싶었습니다. 탄탄대로만 남은 그녀에게 뭔가 의미 있는 선물을 하고 싶었습니다.

김살로메소설가
김살로메소설가

졸업파티에서 입을 한복을 선물할까, 액세서리를 좋아하니 목걸이를 선물할까 이것저것 고민했습니다. 기왕이면 그녀가 받고 싶은 선물을 하고 싶었습니다. 몇 번의 밀당 끝에 제 진심을 안 그녀가 조심스레 말합니다. 청진기를 받고 싶답니다. 미국 간호사는 청진기가 필수랍니다. 선물 받은 청진기로 진료하는 간호사라니, 생각만 해도 멋진 일입니다. 아마존에 접속해 전문 청진기를 검색해봅니다. 그녀가 모델명까지는 끝내 말하지 않으니 화면 앞의 제 눈은 까막눈이 될 뿐입니다. 아쉽지만 차선책으로 송금이란 선물을 택했습니다. 며칠 뒤 청진기에다 제 이름을 새기고 싶다며 그녀가 연락해왔습니다. 쑥스럽지만 고집 피울 일은 아닌 것 같아 그러라고 했습니다.

작년 미국에서 만나자는 약속도 놓쳤고, 올해 서울에서 재회하자는 통화도 코로나 때문에 지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기야 만남 유무가 뭐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마음이 있는 한, 우정은 계속되는 것이니까요. 간호사로 멋지게 성장할 그녀를 멀리서나마 응원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