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목은 이색의 고향 괴시리와 가정 이곡

목은 이색이 태어난 생가터.

지금이야 병원에서 아이를 낳지만 예전에는 친정 가서 아이를 낳았다. 산후조리는 아무래도 시어머니보다 친정 엄마가 심리적으로 편안하기 때문이다.

영덕 영해의 괴시리 마을은 영양 남씨들의 집성촌으로 400여 년간 이어져 내려오고 있지만, 처음엔 함창 김씨들이 고려 말에 괴시리 마을에 살았다. 그때 이 마을 함창 김씨 딸과 사랑을 맺어 장가온 사람이 가정 이곡이었다. 그의 장모가 영양 남씨였고, 아들 목은 이색은 외가인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 목은 이색이 태어난 집터에 고택 한 채를 옮겨놓았고 그를 기리는 공간으로 해 놓았다.

# 고려 말의 대학자 목은 이색

길고 긴 여름 장마가 끝나자 연이어 인간을 나약하게 만드는 태풍이 동해안을 할퀴고 간 상처는 깊었다. 자연 앞에 초라한 인간이 어떤 반성과 겸손으로 해야 자연의 재해가 멈출까? 지구 온난화가 태풍의 가장 큰 원인인데 그 온난화를 만든 인간은 어디쯤에서 욕망을 잠재울까? 태풍으로 상처 깊은 영덕 강구 지나 영해 괴시리 마을은 조용히 아픈 상처를 보듬고 숨죽이고 있었다. 괴시리 마을 중간에서 경사진 산길을 오르면 협소한 골짜기가 나온다. 끝까지 오르면 흡사 자궁모양 제법 넓은 공간이 나오고 맨 위에는 이 마을의 ‘스타’ 목은 이색이 태어난 집터가 나온다. 아직도 더운 여름이지만 생가 터 뒤 솔밭에 들어서자 동해의 시원한 바람이 몸에 안겨 오히려 시원했다. 벤치가 몇 개 놓여있고 이색이 고향 그리며 쓴 관어대소부(觀魚臺小賦) 원문을 길게 세워놓았고 그 옆에 친절히 번역도 해놓았다. 눈으로 한번 읽고는 매미소리 벗 삼아 소리 내어 두 번이나 음미해 보았다.

“관어대는 영해부에 있는데, 동해를 내려다보고 있어 암석의 낭떠러지 밑에 유영하는 고기들을 셀 수가 있으므로 관어대라 이름 한 것이다. 영해부는 나의 외가가 있는 곳이므로….”

“영해의 동쪽 언덕 일본의 서쪽물가엔 흰 파도만 아득할 뿐 그 나머지는 알 수가 없네 물결이 움직이면 산이 무너지는 듯하고 물결이 잠잠하면 닦아놓은 거울 같도다…. 관어대 밑에는 파도가 일지 않아서 고기들을 내려다보면 서로 같고 다른 놈 있어 느릿한 놈 활발한 놈이 제각기 만족해 하누나…. 아 우리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니 내 형체를 잊고 그 즐거움을 즐기며 즐거움을 즐기다 죽어서 내 편안하리. 물아가 한 마음이요 고금의 한 이치인데 그 누가 구복 채우기에 급급하여 군자의 버림받기를 달게 여기랴 슬프도다….”
 

주곡 고택과 마을 분들.
주곡 고택과 마을 분들.

자신이 태어난 고향의 바닷가를 그리워하면서 이렇게 묘사해 놓았다.

그러면 목은 이색은 어떤 사람이었나.

사람을 완벽하게 평가는 할 수 없지만 당시의 시대상황에서 어떤 삶을 살았나를 살펴보면 큰 맥락은 읽어낼 수 있다. 그리고 어떤 가정 어디에서 태어났는가가 그 사람의 일생을 좌우할 수 있고, 어떤 스승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떤 직업으로 평생의 동반자 배필이 누구냐가 결정적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과 교우하는가는 그 사람의 살아가는 가치관과 직결된다.

목은 이색이 태어난 1328년(충숙왕 15년)의 고려는 원나라의 속국에서 벗어나는 몸부림을 치는 격동의 시대를 산 사람이다.

이색(1328~1396)의 아버지 가정 이곡(1298~1351)은 죽부인으로 잘 알려졌지만 원나라에 유학 가서 36세(1333년)때 과거에 2등으로 합격하여 벼슬할 때 이색은 6살 어린 나이로 고향에 있었다. 8살부터 고향 한산 술정산 절에서 글을 읽고 14살에 강화도에 가서 공부하였다. 그리고 14살 어린 나이에 성균관시에 합격하여 벼슬 하면서도 공부는 열심히 하였다. 17살 때는 봄에는 삼각산, 가을에는 감악산, 겨울에는 청룡산에서 공부하였다. 18살에 고향 근처 대둔산으로 내려와서 글을 읽었다. 이때 북경에서 벼슬하고 있던 아버지 이곡이 시로 아들의 공부를 격려한다.

“사내로 태어났으면 황제의 서울에서 벼슬을 해야지./ 자신을 세우려면 부지런히 공부하는 수밖에./ 천하가 작다고 한 공자의 말씀을 너는 기억하겠지./자신이 태산에 높이 올랐기 때문이란다./아비는 30년 전에 독서를 게을리 해서 머리가 희끗해지며 헛이름을 한탄한단다./ 너는 지금부터 한 순간이라도 아껴 배우거라./부귀는 오직 그 길 뿐이란다.”

이색은 이처럼 아버지의 영향을 듬뿍 받고 원나라와 고려에 이름을 떨치는 대학자가 된다.

어느 부모인들 자식 잘 되기를 바라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겠냐만, 이보다 앞선 고려 중기 대표적인 문장가 이규보는 자신은 그렇게 술을 좋아하지만 아들 삼백이 자신을 닮아 어릴 때부터 술을 많이 마시자 아삼백음주(兒三百飮酒 1, 2) 시를 지어준다.

“너 어린 나이에 벌써 술잔을 기울이니 몇 년 못가서 창자가 녹을까 두렵구나./네 아비 늘 취하는 버릇만은 배우지 마아라./한 평생 남들이 미치광이라고 놀린단다./한 평생 망친 게 모두 다 술 때문인데 너까지 좋아할 건 무어냐./삼백이라 이름 지은 걸 이제야 뉘우치니 날마다 삼백 잔씩 마실까 두렵구나.”

지금 시대는 부모와 자식 간에 가벼운 일상을 문자로 주고받을 뿐 부모를 감동시키고 자식을 울리는 깊이가 없다.
 

괴시리 마을앞에 있는  이곡과 이색 부자의 유허비.
괴시리 마을앞에 있는 이곡과 이색 부자의 유허비.

# 그 아버지에 그 아들

아버지 이곡과 아들 이색은 다 같이 원나라에 과거 급제하여 벼슬을 하면서 뛰어난 문장으로 고려를 위하여 많은 역할을 한다. 그의 소설 ‘죽부인전’은 대나무(죽부인)는 18살 연상의 소나무(송)와 결혼하여 남편이 신선이 되어 돌로 변하자 쓸쓸함과 외로움에 술로 세월을 보내도 지조를 지킨다는 내용이다.

사람을 사고파는 인사설(人肆說)은 원나라에 있다가 고려의 개성골목을 지나다 얼굴 아름답게 꾸민 여자들이 예쁨으로 등급 매겨 몸을 파는 여사(女肆), 공문서 작성하고 법을 집행하는 관리들이 뇌물을 받고도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는 관리시장(吏肆·사람시장), 가뭄과 홍수로 입에 풀칠도 못하자 부모는 어린자식을 팔고, 남편은 아내를 팔며, 주인은 종을 팔려고 시장에 줄지어 있는 것을 목격한다. 그러나 그 값은 너무 싸서 개나 돼지 값만도 못하였고, 해당 관청의 관리들도 수수방관했다.

이곡은 이 세 가지 시장이 없어지지 않는 한 그 불미스럽고 가증스러운 결과가 장래에 틀림없이 여기에 머물지 않을 것임을 확신한다 했다.

원 황제에게 올리는 글에서도 속국 된 고려의 비참한 참상을 조목조목 알리며 시정을 바라는 명문장이다. “고려 사람들은 차라리 남자는 살림을 내보내 따로 살도록 할망정 여자는 집에서 길러 부모와 같이 살기를 바라는 풍속이 있습니다. 지금 고려에 사신으로 가는 자들은 모두들 고려 여자를 자기들의 처첩으로 삼아 데려오려고 합니다…. 그리하여 한 번 중국의 사신이 나오면 온 나라가 시끄러워 닭이나 개까지도 편히 살 수가 없습니다. 이 사신들은 이렇게 빼앗아 온 여자들을 모아놓고 잘생기고 못생긴 사람을 고르는데, 때로는 그 사신에게 뇌물을 주어 욕심을 채워주면 아무리 예뻐도 그냥 놓아주고 그보다 못한 여자를 데려가기도 합니다. 일 년에 두 번이 나 한 번씩 일어나고 한 번에 40~50명 된답니다. 선발된 처녀들의 부모와 종족들은 미친 듯이 울부짖으니 그 애처로운 소리는 밤낮으로 끊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들의 슬픈 참상은 차마 볼 수가 없고, 그들은 우물에 빠져 죽거나 목을 매어 죽는 자도 있고 피눈물을 흘리다가 시력을 잃는 자도 있어서 이러한 참상을 일일이 다 기록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이곡의 상소문은 원나라 혜종 황제를 감동시켜 공녀의 요구를 금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때는 원나라도 사양길에 접어들어 간신과 탐관오리들이 득실거려 황제의 힘이 미약했기 때문에 혜종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지만, 이곡의 상소문은 원나라 학자들이 앞을 다투어 구해보고 천하명문이라고 감탄했다 한다.

이곡의 아들 이색은 훌륭한 아버지보다 더 빛나는 이름으로 남는다.
 

생가터 뒤에 있는 관어대소부 비.
생가터 뒤에 있는 관어대소부 비.

그도 손자 맹균에게 “먼저 심술(心術)을 바르게 하고 그런 다음 문장에 힘써라”는 당부의 시를 보낸다. 고려로 와서는 성균관 대사성이 되어 새로운 학문 성리학을 가르치고 20년 동안 과거시험을 여섯 차례나 주관하여 137명 정도의 제자를 배출하였다. 자신은 익재 이제현의 제자였고 그의 제자들은 스승 이색과 같이 불사이군의 자세로 충절을 다한 정몽주, 길재, 이숭인 등이 있고, 새로운 조선왕조 창업에 큰 역할을 하는 정도전, 권근, 하륜 등이 있다. 이색이 가장 아낀 제자가 권근이고, 하륜도 이색의 아들 이종덕을 사위 삼는다. 이색은 한산부원군, 문하시중 등의 재상을 지내고 우왕의 사부가 되어 꺼져가는 고려왕조를 지키기 위해 이성계의 조선건국에 반대한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조선건국에 반대한 친구 이색을 서인으로 삼아 장흥으로 귀양 보내고 종신토록 양반이 되지 못하게 하였다. 이때 붓을 꺾었다 한다. 아들 종학도 곤장 100대를 때려서 먼 곳으로 귀양 보냈다. 종학은 한 달 뒤 귀양지에서 죽었다.

이성계는 당시 최고의 학자이자 사림의 존경을 받던 이색이 자신의 건국을 도와주기를 바랐는데 이색은 선비의 지조로 끝까지 반대하자 분풀이로 귀양 보내고 두 아들도 죽였다. 세월이 지나면 분도 풀리듯이 1년 뒤 이성계는 이색을 사면시켜주고 친구의 예로 술잔을 나누고 잔치도 베풀었다. 이성계는 여러 조건으로 새 왕조에 참여하기를 권했지만 이색은 망국대부로 남았다. 1396년 파란만장한 격동기를 살다가면서 백이정, 우탁, 정몽주와 함께 경학의 대가였던 이색이 죽자(고려 왕족을 바다에 수장시켰듯이 이색도 남한강서 배가 폭파되어 죽는데 이성계가 시켰다는 설) 이성계(태조)는 매우 슬퍼하면서 3일이나 조회를 파하고 사신을 보내 정중히 제사지내고 문정(文靖)이란 시호를 내린다. 목은 이색이 남긴 수많은 문장이 있지만 “차라리 오늘 버림을 받을지언정 다음에 어리석은 비웃음을 받지 않겠다”는 말이 귓전을 울린다. /글·사진 = 기행작가 이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