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화진 <br>지킴랩 기업탐정본부장 <br>전 경북지방경찰청장
박화진
지킴랩 기업탐정본부장
전 경북지방경찰청장

“정부미였습니다.”, “??? 아! 예”

퇴직 후 이전에 어떤 일을 했냐는 물음에 대한 나의 답과 상대의 반응이다. 큰 장애 없이 공무원으로 일했다는 의사소통이 이뤄진다.

70년대 단군 이래 숙업이었던 식량자급의 기치를 내걸고 정부가 야심차게 개발한 다수확 품종 쌀, 통일벼라는 이름을 가진 작물이 있었다. 일반벼보다 수확량이 40% 더 많아서 정부에서 강권하다시피 재배하게 했다. 쌀을 주식으로 삼는 국민들의 식량난 해결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정부에서 재배를 권장했기에 정부미라 불렸다. 절대 양은 늘었는데 질적인 문제까지 해결되지 않은 모양이다. 찰기가 적어 맛이 떨어지고 볏짚도 사료용과 연료용 이외에는 큰 쓸모가 없었다고 한다. 배고픔 벗어나기엔 성공했지만 농민들의 재배 선호도는 낮았다. ‘정부미’는 기초수급자 및 재난 구호목적과 국공립시설 등에 제공되는 비축재다. 통일벼가 정부미의 대명사처럼 여겨졌다. 곡물 과잉 공급의 원흉이 되어 통일벼는 생을 마감했다.

정부미는 공무원들을 부르는 또 다른 유품으로 살아남았다. 일반인보다 못하다는 의미도 내포돼 있는 공무원들의 자기 비하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공직자도 사람인데 정부의 비축 재물로 부르는 것이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공무원 스스로 정부미라고 부른 경우가 왕왕 있었으니 그런 직업의 별칭에 대해 반감을 겉으로는 나타내지 않는다.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군림하려는 공무원에 대한 불만을 대리 해소시켜주는 말로써 다소 속 풀리는 느낌을 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어떤 명분으로도 사람을 재물로 부르는 것은 천부인권의 지고지순한 원리에 반하는 것이다.

‘사람이 먼저다’는 수사(修辭)가 넘쳐나는 시대다. 사람이 최우선이라는 말이다 어떤 것으로도 사람을 대체할 수 없다는 함의도 갖고 있다. 최근 정부 고위 공직자가 ‘의사는 공공재’라는 말을 했다가 곤혹을 치르고 있다. 울고 싶은 데 뺨 때린 격으로 의사들의 파업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됐다. 앞으로 사직당국에서는 의사에게 상해를 입히면 재물손괴죄로 단죄해야 할 것 같다. 고위 공직자의 사람에 대한 인식의 일단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어서 더욱 문제의 심각성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다. 의료의 공공적 성격을 잘못 표현한 것이라고 특급 소방수가 투입됐지만 이미 반 이상 건물이 탄 뒤 출동한 모양새다.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어휘선택은 파장효과를 감안하면 언제나 신중함을 잃지 말아야한다. 파리와 공통점을 가진 사람이 그들일 수 있다는 우스갯말이 있다. 두 집단 모두 잘못하다가 신문지에 맞아 죽는다는 점이라는 것이다. 둘둘 말린 신문지에 맞아죽는 파리처럼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경솔한 말로 여론의 질타를 받게 되면 큰 뜻을 이루지 못하고 운명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정부미는 역시 영양가 없는 거야!’라는 말에 ‘맞아! 우리는 정부 비축재지’라며 기분 좋게 맞장구치겠는가? 감정이 이성을 앞서게 되는 것이 사람 사는 세상 이치다.

“신중하자 정부미여!” 일찍 품절된 선배 정부미가 꼰대질 한번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