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문동과 소나무의 조화가 멋지다.

해가 지기 전 황성공원 맥문동 군락지를 찾아갔다. 기와가 늠름한 시립도서관 앞에 주차를 하고 산책로로 걸어 들어갔다. 수백 년 된 나무들과 굴곡진 모습의 소나무들 사이로 남은 햇살이 옆으로 드러눕는다. 가지치기를 한 나무 사이로 빛내림이 환상적이다. 그 햇살을 비껴 받은 보랏빛 자태가 곱다.

여름의 마지막 꽃이라 불리기도 한다. 보랏빛 맥문동이 8월의 경주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그것은 맥문동 혼자만의 일이 아니다. 묵직한 무게감의 굽은 소나무가 산책로 사이를 채우고 있어서 오가는 사람들에게 더 멋진 풍경을 선사한다. 바람이 불 때는 맥문동이 향기를 내뿜은 듯 사람들을 취하게 한다.

황성공원 맥문동 군락지는 이른 아침이나 저녁노을 무렵 방문하면 좋다. 한여름 더위를 피할 수 있고, 사진을 찍기에도 훨씬 좋다. 새벽녘 물안개가 드리워진 모습을 찍으면 금상첨화겠지만 매일 새벽 찾아가도 몇 번 만나기 힘든 장면이다.

비스듬히 보랏빛 융단 위로 솟은 소나무가 사람 인(人)자 형상이다. 두 사람이 등을 서로 맞대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라고 해석을 한 성인들의 말을 대변하듯 굵은 소나무들이 서 있다. 맥문동 군락지 옆으로 이어지는 산책로를 걸으면 심신이 안정되고 저절로 힐링이 되는 이유는 땡볕아래 꽃만 있어서는 느낄 수 없다. 소나무가 하는 역할이 큰 것이다.

첫 날은 오래 사귄 벗과 그 꽃길에 들어섰다. 며칠 지나 두 번째로 갈 때는 새로 사귄 벗들과 함께였다. 친구들과 꽃에 취하고 저녁 어스름에 울어대는 풀벌레 소리에 취해 꽃길을 거닐었다. 사람 둘이 만나서 친구가 되면 仁(인)이 된다. 仁자는 ‘어질다’나 ‘자애롭다’, ‘인자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혼자서는 이룰 수 없는 것이다. 두 사람이 만나서 친구가 되어야지만 어질고 인자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친구이다.

황성공원은 원래 신라시대 화랑들의 훈련장이었다. 젊은 청년들이 만나 친구가 되어 호연지기를 키우던 곳이었다. 지금은 경주 사람들의 휴식처이다. 산책로에는 맨발로 걷는 사람, 운동기구에 앉아 몸을 단련하는 사람, 유모차를 끌며 산책하는 가족들로 늘 수런거린다. 그 위로 수령이 수백 년에 이르는 느티나무를 비롯하여 이팝나무·회나무·떡갈나무·살구나무·향나무·상수리나무가 우거져 다람쥐와 청설모가 오르내리는 모습을 쉽게 만난다.

호림정 뒤로 솟아 있는 동산 위에는 높이 16m의 김유신 장군 동상이 서 있다. 공원 안에는 경주실내체육관, 시립도서관, 공설운동장, 충혼탑, 박목월 시비, 국궁(國弓) 궁도장 호림정 등이 있다. 2년에 한 번씩 짝수 해의 10월 초순에 이곳에서 신라문화제가 열리며, 공설운동장에서는 매년 동아마라톤대회가 열린다.

경주 황성공원은 이제 전국 최고의 맥문동 성지가 됐다. 2015년부터 심은 맥문동이 약 1만5000㎡에 이른다. 맥문동은 여름철 산과 들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꽃이다. 길 가다 보면 한두 포기 띄엄띄엄 꽃이 피어 있어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러나 맥문동이 군락지를 이루면 분위기는 180도 달라진다. 백합과에 속하며 늘 푸른 여러해살이 식물이다.

김순희수필가
김순희수필가

높이는 20~30cm 정도 자란다. 꽃말도 들으면 들을수록 기분 좋은 ‘기쁨의 연속’이다. 맥문동이란 이름은 뿌리의 굵은 부분이 보리와 비슷하다 하여 맥문(麥門)이라 하고, 겨울을 이겨낸다 하여 동(冬)을 붙인 것이라고 한다. 잎이 난(蘭) 모양이며 뿌리는 한약재로 가래, 기침 등에 사용된다.

가을에 접어들면서 보랏빛 꽃은 눈동자가 까만 열매로 변신한다. 꽃대마다 다닥다닥 붙은 구슬이 또한 볼거리이다. 꽃말처럼 여름부터 가을까지 연속적으로 기쁨을 주는 존재이다. 그늘에서 잘 자라는 본성 때문에 둥치가 굵은 소나무와 궁합이 딱 맞은 듯하다.

보랏빛 꽃물결에 흠뻑 젖었다가 숲을 빠져나왔다. 화랑이 거닐던 그 숲에서 좋은 기운을 받았더니 친구들의 얼굴에 보랏빛 웃음이 활짝 피었다. 仁(인)을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