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홍 섭

어느 귀머거리 화가가 그려준

매화 한 폭을

벽에 걸어놓았더니

어느 날 벽이 열리면서

창이 하나 났다

벙그는 매화 사이로

당나귀 한 마리와

조금 무거워 보이는 봇짐과

싸래기눈이 지나갔다

시인이 들려주는 선화(禪畵)에 얽힌 일화가 그윽하다. 여백 속으로 많은 의미망이 짜진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 비록 귀는 멀었지만 뛰어난 시각은 우주를 꿰뚫어 보는 것 같다. 시인은 조금 무거워 보이는 봇짐 같은 생의 무게를 지고 가는 우리를 떠올리며 힘겨운 인생길을 그 그림에 접목시켜 보려 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