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휘 논설위원
안재휘 논설위원

‘칼을 빌려 사람(상대방)을 죽인다’는 뜻으로 직역되는 차도살인(借刀殺人)은, 흔히 중국 남조 송(宋)의 명장인 단도제(檀道濟)가 지은 것으로 알려진 단공삼십육계(檀公三十六計)의 세 번째 지략이다. 직접 싸우지 말고 타인을 이용하라는 말로 의역되기도 한다. 그러나 수세에 몰릴 적마다 남의 칼을 빌려 휘두르는 통치란 결코 정의롭다고 말할 수 없다.

세기적 돌림병 코로나19 싱크홀이 이 나라에서는 뜻밖으로 정권에 행운의 여신으로 작동한다. 정적 소탕과 정책 실험, 국론 분열의 선동 굿판만 거듭해온 문재인 정권 앞에 코로나19는 민심을 흐리는 연막탄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나아가 작금 바이러스 재확산에 즈음해서는 반대자를 향한 합법적인 탄압의 칼로 변질될 위기에 처해 있다.

문재인 정부는 집권 4년 차에 접어들었지만, 실정의 뿌리를 번번이 지난 정권을 비롯한 다른 원인에다 돌려 붙이는 ‘남 탓’ 정권, ‘핑계 정부’에 머물러 있다. 부동산 혼란으로 민심을 잃어 전전긍긍하던 정세를 반전시킬 묘책으로 ‘행정수도 이전’, ‘현충원 친일파 파묘(破墓) 논쟁’ 폭탄을 마구 던지던 여권은 8.15 대규모 반정부집회가 터지자 일제히 ‘코로나 칼’을 치켜들었다.

코로나 재창궐은 휴가철에 경각심을 낮추는 성급한 조치들을 내린 당국의 방역실패라고 보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그러나 문 대통령이 연일 방역 방해 활동을 찍어 ‘공권력 집행’을 외치고, 당은 코로나 사태 초기에 앞다투어 신천지를 때리던 같은 기술로 전광훈 목사를 철천지원수로 만드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전당대회마저 ‘남 탓’ 광기에 빠져 전광훈과 김종인을 한 몸으로 엮는 표독스러운 험구 세례로 책임을 덧씌우는 막말 경연대회로 치르고 있다.

광화문을 울린 정권비판 구호는 종적을 감췄다. 그 많은 이들이 모여서 한목소리로 외친 민심은 코로나 소동에 모조리 형해화돼버리고 말았다. 사랑제일교회를 압수 수색한 당국이 ‘통신사 기지국 정보’를 이용해 집회 당시 광화문 인근에 머문 1만576명 모두의 연락처를 확보했다는 소식이다.

드디어 광화문 반정부 시위대에 있었거나 그 언저리에 있었던 사람들, 최소한 적극적인 비판 정서를 가진 국민의 명단을 상당수 확보한 셈이니 이거야말로 정권안보 차원에서 큰 소득일 것이다. 겉으로는 코로나 방역에 협조하지 않은 죄, 속으로는 반정권의 죄를 물을 합법적인 자료가 생긴 셈 아닌가. 문득 조지오웰의 소설 ‘1983’이 떠오르면서 소름이 돋는다.

‘남 탓’ 공화국은 희대의 비극이다. 1990년대 유행처럼 차량 뒷유리에 붙였던 ‘내 탓이요’ 스티커가 생각난다. 고(故) 김수환 추기경께서 남을 탓하기 전에 자신부터 돌아보자며 시작한 그 ‘내 탓이오’ 운동을 다시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찬성하는 사람도, 반대하는 인사도, 방역에 협조하지 않는 장삼이사도 다 대한민국 국민이다. ‘코로나’라는 칼을 빌려 ‘엄정 대응’하거나 ‘법정 최고형’으로 때려잡아야 할 주적이 결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