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 옮겨온 수다재 재사.
두번 옮겨온 수다재 재사.

근대화와 산업화를 거치면서 도시로 도시로 뿔뿔이 흩어져 살았지만 농경사회에서는 같은 집안끼리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즉 피를 통한 혈연중심의 삶을 지탱해왔다. 그중에서 안동이 유독 강하고 많았다. 진성 이씨는 안동 북쪽의 도산을 중심으로 그 아래 강 건너 분강 마을은 영천 이씨, 횡성 조씨, 예안의 단양 우씨, 그 아래는 광산 김씨, 평산 신씨, 반변천의 무실, 박곡은 전주 유씨, 내 앞 마을은 의성 김씨, 흥해 배씨, 서쪽에는 안동 권씨. 진주 하씨. 원주 변씨, 안동 장씨, 안동 김씨, 풍산 유씨 등등의 여러 문중을 중심으로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고성 이씨들은 낙동강과 반변천(임하댐)이 합수되는 곳에 강을 두고 남, 북으로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 고성 이씨 안동 입향조 이증의 신도비와 수다재

원이 엄마의 애절한 사연이 있는 귀래정에서 동쪽으로 조금만 가면 어은정과 재사가 나오고 150여 미터만 더 가면 고성 이씨 안동 입향조 이증(1419~1480)의 붉게 입힌 글씨의 신도비가 있고, 그 이증을 제사 지내는 수다재 재사가 있다. 1600년대 지어져 1974년 안동댐으로 면자체가 없어진 월곡면 미질동에서 예안면 기사리로 옮겼다가 다시 1998년 여기로 옮긴 기구한 운명의 수다재(水多齋)는 이름대로 많은 물과 깊은 인연으로 이증의 신도비와 함께 두 번이나 옮겨야 했다.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원(1368~1429)의 여섯 째 아들인 이증은 영산현감을 지냈고 안동에 오게 된 연유는 안동의 아름다운 산수에 반해 정착한 곳이 지금의 임청각 터였다. 그의 둘째 아들이 여기 인근에 귀래정을 지은 이굉(李汯)이고, 셋째 아들이 중종 때 형조좌랑을 지낸 이명(李洺), 그가 지금의 임청각을 짓는다.

수다재는 이증의 묘제를 지내기 위하여 지어진 건물인데 입구부터 온갖 다육이가 줄지어 놓여있다. 문 열린 대문에 들어서서 주인은 불러도 없고 빈 공간은 다육이로 채워 놓았다. 본채는 안동 서럽게 높게 지었고 ‘ㅁ’자로 높낮이를 정해 공간을 많이 활용하게 했다. 좁은 공간을 부엌과 광, 뒤주 등으로 제실의 용도에 맞게 복잡하면서 오밀조밀하게 해 놓았다. 재사 건물은 용도가 제사지낼 때 편리성으로 지은 것이라 살림집 같은 정이 흐르거나 아늑한 공간이 아니라 큰 매력은 없다. 한옥의 공간은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워두는 여백의 미가 있어야 한결 여유로운 맛이 나는데, 좁은 공간에 분재와 다육이가 빽빽하여 답답하고 어지럽다. 그러나 이 건물도 안동 김씨의 이상루 재사 같이 활용하는지 주인의 손길이 나 반질반질하다.
 

어은정  앞에서 윷 놀이 하는 안동의 노인분들.
어은정 앞에서 윷 놀이 하는 안동의 노인분들.

#. 반구정과 권정달

수다재와 마주보는 가까운 곳에 반구정 재사와 반구정이 있다. 이 반구정은 강 건너 임청각을 지은 이명의 여섯 째 아들 반구옹(伴鷗翁) 이굉(李肱)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1530년대에 지은 건물이다. 자신의 호도 갈매기와 벗하는 늙은이 반구옹을 했으니 이 분도 인근에 귀래정을 지은 삼촌 이굉 같이 낙동강의 갈매기를 보면서 귀거래(歸去來) 한 것이다. 귀래정이 전국에 있듯이 이 반구정도 많다. 대표적인 것이 파주 임진강변의 반구정인데 세종 때 무려 18년이나 영의정 지낸 황희(1363~1452)가 87세(1449년)의 나이에 사임하고 지은 것인데, 그래도 3년이나 갈매기와 벗하면서 살았으니 청백리의 아름다운 명재상이라 천복을 준 것이다. 정자라기보다 4칸의 반듯한 살림집 같았고 방을 좌우에 한 칸씩 넣어 실용적인 정자였다. 안동의 유림들이 시회와 향회를 자주 열었다 하고, 선비들의 출입이 잦아 서원모양으로 동, 서재를 지어 마치 작은 서원 같았다. 반구정 옆에는 조그마한 재사 건물이 있고 문화재 수리하는 분들이 건물을 수리하고, 문 칸 방에서는 할머니 한 분이 방에서 막 나오고 있었다.

다시 신도비기 있는 길가로 나오자 카페 내부는 수리중인데 대문에 눈에 띄는 이름이 보였다. ‘권정달 장군 향리고택’. 그가 누구인가 한때 나르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실세 아니었던가. 12·12 쿠데타로 실권을 장악한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국보위 상임위원장 밑에서 실세 중의 실세, 보안사 대령 출신 권정달 아니던가. ‘정의 사회를 구현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창당한 민정당의 사무총장에, 안동 권씨 가문의 막강한 파워에, 국회의원 등등. 책을 좋아한 필자가 옛날에 사 본 ‘여자가 눈물을 흘릴 때’ 책이 떠오른다. 남편 권정달에게 이혼당한 그의 부인 용인순의 책 제목이다. 사랑은 두 사람 사이만 아는 일이라 무어라 말할 수 없지만, 재혼한 부인 덕에 안동은 국제적인 명성을 얻는다. 국제적인 감각을 가진 도영심 유엔세계관광기구 재단 이사장이 권정달 국회의원이 실세일 때 재혼하여 같이 국회의원도 했다. 특히 시댁 안동의 탈춤을 세계에 알리고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도 경주가 아닌 안동으로 오도록 한 공로가 크다. 양반들이 괄시한, 상민들의 욕구 해소인 하회 탈춤을 1990년대 초부터 알리는데 노력하여 ‘안동 국제탈춤페스티벌’이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알 수 없지만 23회째가 된다.
 

반구정 정자.
반구정 정자.

#. 어은정과 문무를 겸비한 고성이씨 쓰리 스타

반구정을 지은 이굉의 아들인 어은 이용도 반구정에 은거하면서 아버지와 같이 자신의 호를 정자 이름으로 하였다. 아버지가 나르는 갈매기와 벗한다면 자신은 물속에 숨은 물고기(漁隱)로 했으니 더 침잠하는 삶이다. 1570년(선조 3년)에 지었다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정자인데 안과 밖 모두 명호서원(明湖書院) 현판이 붙어있다. 명호서원은 고성 이씨 안동 입향조 이증의 아버지 이원과 갑자사화 때 사사된 이주를 제향했던 곳이다.

이 건물도 안동댐 수몰로 1974년 와룡면 도곡리에서 이곳으로 옮겨 지은 집이다. 붙어 있는 재사 건물은 작지만 알차고 다부진 건물이었다. 여기도 고택체험 하여 정리는 어느 정도 되어있었다. 문은 열려 있고 불러도 사람 없어 사진 찍으며 건물을 살펴보는데 자전거 끌고 안주인이 왔다. 세찬 비 온 뒤라 어수선함을 감당하기 힘든지 잠시 사진 찍고 어은정 구경 왔다고 정중하게 말해도 시무룩한 채 아무 반응도 없어 무안해서 그냥 나왔다. 담 옆에 마을 정자에 노인 분들 조그마한 은행 알로 윷놀이하고 있었다.

중국에서 건너온 고성 이씨의 시조는 이황(李璜·퇴계 이황과는 동명이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의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면 노자(老子·이름은 이이(李耳) 율곡 이이와 동명이인)다. 구전되어 오는 전설적인 이야기지만 노자의 어머니가 81년 동안 임신했다가 오얏나무(자두나무) 아래서 낳았다 하여 오얏나무 이(李)를 성으로 했다 한다.

행촌 이암(1297~1364)은 고려 말의 조맹부의 송설체의 명필이었고, 1361년 10만의 홍건적이 침략해올 때 공민왕이 안동으로 피난 가는 중 행촌은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의병을 모집하여 호종공신 1등으로 되었다, 그러나 정세운 이방실, 김득배 등이 홍건적 토벌에 큰 공을 세우고도 죽임을 당하자 수문하시중 벼슬을 사임하고 강화도로 은퇴 했다가 3년 뒤에 죽는다. 무엇보다도 그가 남긴 ‘단군세기’의 저자라 빛난다. 그의 제자 중에는 목은 이색이 있다.

고성 이씨가 낳은 걸출한 인물은 조선을 뒤흔든 이괄(1587~1624)이다. 문무를 겸비한 이괄은 영의정 이원의 6세손으로 어린 나이에 관직에 나가 지략이 뛰어나고 문무를 겸비한 걸출한 풍운아였다.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에 합류하여 머뭇거리고 늦게 온 김류를 대신하여 반정을 성공시킨, 가장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권력 주변에 한자리 하려고 불나비처럼 모여든다. 특히 쿠데타를 하면 논공행상이 있고 권력에 진입하기 위해 거짓 밀고도 한다. 1624년 문희, 허통, 이우가 이괄과 그의 아들 이전, 기자헌, 한명련, 이시언, 정충신 등이 반란을 계획하고 있다고 고변한다. 반정의 최고 공로자 이괄, 광해군 때 영의정 지낸 의리와 명분을 내세운 지조 있는 학자인 기자헌, 왜란 때 많은 무공을 세운 이시언, 의병장 권율 휘하에서 큰 전적을 올린 무신 한명련 등을 지목했다. 엄중한 조사 끝에 무고가 밝혀져 조사담당관이 고변자를 사형 시키려고까지 했다. 그러나 반정 공신들은 이괄을 잡아와서 신문한 뒤에 부원수작을 해임시키자고 했다. 인조는 이괄의 외아들 전을 모반의 사실여부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서울로 압송하라고 명한다.

옮겨온 어은정.
옮겨온 어은정.

역모로 몰리게 되면 죽음이란 것을 간파한 이괄은 부하들과 의논하여 금부도사 고덕상, 심대림, 선전관 심지수를 목을 베고 이괄의 난이 시작된다. 1624년 1월 22일 항 왜병 100명을 선봉에 1만의 군사로 파죽지세로 2월 10일 서울까지 점령한다. 인조는 2월 8일 공주로 피난 간다. 이괄은 선조의 아들 홍안군을 왕으로 추대하고 성공하는 듯했으나 도원수 장만과 마지막 전투에서 패하고 이괄은 헌명련 등과 패잔병 수백 명을 데리고 2월 15일 이천에 머물 때 마지막 부하장수 기익헌과 이수백은 자신들만 살기 위해 이괄과 한명련의 목을 베어 조정에 바친다.

안동의 임청각(臨淸閣)은 1519년 이명(李洺)이 양반가로서는 최고치인 99칸의 집으로 현존하는 민가로는 가장 커서 유명하고 독립운동가 석주 이상룡(1858~1932)과 집안에 독립운동가 10명을 배출하였기 때문에 더욱 유명하다. 500년 가까이 고성 이씨 종가로 이어오다 나라 잃자 조상의 신주 묻고 나라 찾겠다고 전 재산 팔아 만주로 떠난 그 희생정신은 길이길이 기억하고 선양해야 된다. 신흥무관학교를 새워 독립군을 양성한 석주는 독립자금이 부족하여 몰래 임청각 집까지 팔아서 독립운동 했다. 문중에서는 십시일반 돈을 모아 사들였고, 몇 번의 우여곡절 끝에 2002년 국가에 헌납한 아름다운 실천의 용기에 찬사를 보낸다. 집 앞에는 일제가 앙갚음으로 철길로 반 토막 내어 상처 입은 용이 되었다.

/글·사진 = 기행작가 이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