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현 지사
남자현 지사

 

【영양】 1872년 영양군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난 남자현 지사는 1895년 을미의병 활동으로 남편 김영주가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했다는 남편의 전사소식으로 복수심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지만 3대 독자 유복자인 아들과 시부모를 봉양하지 않을 수 없어 양잠을 하며 손수 명주를 짜 내다 팔아 가계를 이어 나갔다.

남편 전사의 한을 가슴에 항상 품고 있던 남 지사는 1919년 3·1운동 때 40대 중반의 나이로 남편의 유지를 이어서 만주로 건너가 만주 무장독립운동단체 서로군정서 최초 여성 대원으로 독립군 대원들 옷을 만들고 먹을 것을 준비하는 등 뒷바라지를 하며 독립투쟁을 시작했다.

1925년 국내로 잠입해 1926년 총독 사이토 마코토의 암살을 계획을 기점으로 무장투쟁으로 전환했으나 실패하고 1932년 국제연맹 리턴조사단이 하얼빈에 도착하자 무명지를 끊어‘조선독립원’이란 혈서를 써서 끊어진 손가락과 동봉해 전달하며 조국의 독립을 호소했다.

1933년 만주 괴뢰정부 건국일(3월 1일)에 이규동 등과 함께 연락 및 무기운반 등의 임무를 띠고 일본장교 무토 노부요시를 살해하기 위해 걸인노파 차림으로 폭탄과 무기를 휴대하고 가다가 하얼빈 교외 정양가를 지나다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일본 경찰에 붙잡힌 남자현 지사는 1933년에 6개월간의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며 옥중에서 17일간의 단식투쟁을 벌이다“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먹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정신에 있다.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느니라”라며 순국전에 아들에게 248원을 건네면서“조선이 독립을 하게 되면 이 돈을 독립축하금으로 전달하라. 만일 너의 생전에 독립을 보지 못하면 너의 자손에게 똑같은 유언을 하여 내가 남긴 돈을 독립축하금으로 바치도록 하라”라는 최후의 유언을 남기고 같은 해 8월 향년 61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남자현 지사는 이러한 독립운동 이외에도 북만주 일대에 농촌을 누비며 12곳에 교회를 건립하는 등 여성계몽에도 힘써 10여 개의 여성교육회를 조직하며 여권신장과 자질향상에도 주력했다.

당시 하얼빈의 사회유지, 부인회, 중국인 지사들은 남자현 지사를‘독립군의 어머니’로 존경하고 하얼빈 남강외인 묘지에 안장해 입비식을 갖고 생전의 공로를 되새겼다.
향후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며 그의 공적을 기려 1999년 영양군 석보면에 남지사 생가를 복원하고 2003년 현충시설로 지정했다.

/장유수기자 jang7775@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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