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문화인진흥재단 문신자 이사장

문신자 이사장은 집념은 기적을 낳고 노력은 천재를 만든다고 믿고 있다.
문신자 이사장은 집념은 기적을 낳고 노력은 천재를 만든다고 믿고 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을 만나보면 의외로 소박한 경우가 많다. 일정 궤도에 올라서면 그들은 궤도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에 순응하며 달려간다. 그러다 보니 더이상 자신을 포장해야 할 일도, 일부러 드러내야 할 일도 줄어든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인간은 인정 투쟁을 하며 살아간다고 설파했다. 인정받기 위해 투쟁한다는 말이다. 타인에게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라서 인간의 삶은 바로 이 인정 투쟁의 현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종종 일부 소수의 사람들이 이 인정 투쟁의 장에서 이탈하여 고유한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지만 보통 사람들에게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먹고살기 바빠 아이들에게 관심 적던 시절
인사하는 법 가르치며 생활 바꿔보려 노력
‘습관이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는 생각으로
당시 파격적이었던 토론 교육도 시작해

교직 은퇴 후 가톨릭대 미래지식포럼 개설
이후 경북과학대 사회교육원장 등 거치며
지역 분야별 리더들과의 교류·화합 이어가

현재 한류문화인진흥재단 이사장 자리에서
어려운 환경 처한 지역 문화예술인 성장 지원
14년째 우즈베키스탄과의 교류사업도 맡아
교육장 떠났지만 大母의 사회봉사는 진행중

대구의 랜드마크로 발돋움한 수성못가의 수성호텔에서 흔히들 대구의 대모라고-250만 명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대구에서 특정인을 대모라고 불러도 되는지의 문제는 제쳐두고- 불리는 문신자 이사장을 만나 지금까지의 삶 중에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을 물어보았더니 초등학교 교장을 하던 때였다는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팔순이 넘었지만 여전히 건강해 보이는 문 이사장은 오래전에 그만두었을 초등학교 교장 시절을 되돌아보면서 기운이 되살아나는 듯 했다.

“초등학교 교장 할 때가 가장 보람 있었지요. 그때는 아직 우리나라가 그렇게 잘 살지 못할 때였고, 부모들이 먹고살기 바빠서 지금처럼 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못할 때였어요. 나는 아이들에게 인사 하는 법을 가르쳐 주면서 그들의 생활을 바꿔 보고자 했어요. 자신이 고쳐야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을 인사말로 하라고 했어요. 예를 들어 숙제를 잘해 오지 않는 아이는 선생님을 만나면 ‘숙제를 잘해 오는 OOO가 되겠습니다.’라는 식이었죠. 처음에는 아이들이 쑥스러워 했지만 그 인사말로 아이들이 바뀌기 시작했어요. 숙제를 안 해오던 아이는 그 인사말을 늘 하다 보니 숙제를 해오게 되는 식이었죠.”아이들이 그렇게 인사를 하면 문 이사장은 칠성시장에서 사 온 사탕을 나눠 주었는데 그 사탕을 받기 위해 아이들이 운동장까지 줄을 섰다고 한다. “나는 효자가 되겠습니다. 나는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겠습니다. 나는 밥을 잘 먹겠습니다”라는 인사말들은 사소하면서도 파급력이 컸다고 했다.

아이들의 부족한 부분을 인사말로 하도록 한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소리에는 생명이 있어서 상대의 가슴에 남는다. 그러므로 소리를 낼 때는 잘 생각해서 내야 하는데 그렇게 반복적으로 소리를 내는 인사를 하다 보면 그 말의 생명이 아이를 바꾼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집념은 기적을 낳고 노력은 천재를 만든다고 문 이사장은 믿고 있는데 특히 초등학교 때는 가르치는 대로 행동이 바뀌는 것이 눈에 보여서 보람이 있었다고 했다.

“인사말을 통해 아이들의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도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인격이 바뀌고 인격이 바뀌면 운명이 바뀝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당시에는 파격적이었던 토론 교육을 시키기 시작했다. 우리나라는 지금도 토론문화가 부족한데 당시에는 너무나 열악한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토론 교육을 시키면서 토론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문 이사장은 초등학교 교장을 끝으로 교직에서 은퇴하고 가톨릭대학에서 미래지식포럼이라는 사회교육원을 개설해 초대 원장으로 취임했다. 대구의 정·재계, 행정인, 법조인들이 등록했는데 그들 각자는 자기 분야의 리더인 사람들이 대부분이어서 일괄적인 관리가 어려웠다. 그러나 오랫동안 교육계에 있었던 경험을 살려 그들의 개성과 분야를 존중하면서 포럼을 성공적으로 끌고 갔다. 미래지식포럼이 성공적으로 운영되면서 경북과학대 사회교육원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문 이사장은 거기서 미래지식포럼과 비슷한 최고지도자과정을 운영했다. 미래지식포럼과 경북과학대 사회교육원은 지역 리더들의 사교모임 장이 되었다.

 

“초등학교 교장 할 때가 가장 보람 있었지요.
나는 아이들에게 자신이 고쳐야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을 인사말로 하라고 했어요
처음에는 쑥스러워 했지만 그 인사말로 아이들이 바뀌기 시작했죠.”

문 이사장은 그렇게 초등학교 교장에서 대학의 사회교육원 원장으로 생활을 바꾸면서 사회에서 맡는 직책도 늘어갔다. 힘든 일이었지만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기꺼이 받아들였다. 사회를 위한 봉사라는 마음이 없으면 하기 어려운 일들이었다.

서서히 삶을 정리해 가는 나이를 살고 있는 문 이사장에게 요즘의 관심사에 대해 물어 보았다.

“남의 말 좋게 하기입니다. 손가락으로 남을 가리켜 보세요. 손가락 하나가 남을 향하면 셋이 나를 향합니다. 남의 흉이 하나면 내 흉이 셋이라는 뜻이지요. 말은 산울림과 같은 것입니다. 말이 총칼보다 무서울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선을 베풀면 선이 오고 악을 행하면 악이 오는 법입니다. 말도 때와 장소가 있는 법인데 바른말이라도 때와 장소를 가려서 해야 합니다. 바른말이 남에게 상처 주는 경우도 많거든요. 남을 흉보는 사람이 있으면 껌을 씹더라도 남을 씹지 말라고 합니다.”

‘봉사가 개천 나무란다’고 남의 탓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책임감이 높은 사람은 남 탓보다 내 탓을 더 한다고 했다. 가톨릭 기도문 중에 ‘내 탓이로소이다. 내 탓이로소이다. 내 큰 탓이로소이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어떤 일이 닥쳐도 내 탓이라고 생각하면 남을 탓할 일이 줄어들고 흉을 볼 일도 줄어든다는 것이다.

현재 한류문화인진흥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는 문 이사장은 문화예술인들을 지원하는 사업을 펼치고 있었다. 한류가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면서 촉발된 경제효과는 엄청났다. 문화예술이 문화예술의 영역에서만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브랜드 가치를 상승시키면서 경제적인 영역에까지 엄청난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한류 문화 스타가 대를 이어 가기 위해서는 어린 문화예술인들의 성장을 지원해야 하는데 우리나라 현실상 그렇지는 못하다. 개인적으로 성공하면 나라가 그 덕을 보는 셈이다. 재능과 끼는 타고 났지만 어려운 환경 때문에 그 재능과 끼를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는 차세대 아이들이 너무나 많다. 대중문화, 예술 체육 등 차세대를 이끌어갈 꿈나무들을 지원하는 것이 이 재단의 사업인데 문 이사장은 혼신의 힘을 다해 재단을 이끌고 있다. 초등학교 교육의 현장에서는 벗어났지만 지금도 아이들의 미래를 걱정하고 지원하는 일을 계속 하고 있는 것이다.

그와 더불어 한국·우즈베키스탄과의 문화교류 및 경제지원사업을 14년째 계속하고 있다. 대구시는 35개국과 교류를 위한 국제교류협회를 조직하고 있는데 문 이사장은 그중에서 우즈베키스탄과의 국제교류에 힘을 보태고 있는 것이다.

르네상스 이후 인류는 휴머니즘의 시대로 들어섰지만 진정한 휴머니즘 시대가 도래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21세기는 상품이나 서비스를 제공할 때 그 기술을 이용하는 사람의 인간관계 기술까지 기계적인 환경을 인간 환경에 맞게 제작하는 시대다. 기계가 인간과 함께 생활하는 게 당연한 시대인데 그럴수록 휴머니즘이 강조되어야 한다. 인간관계까지 기계적으로 변하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잊고 산다. 2차 세계대전과 6·25를 겪은 문 이사장은 급변하는 시대 상황을 지나면서 그래도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휴머니즘이라고 강조했다. 휴머니즘은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정신이고 그러자면 먼저 말부터 가려야 한다는 것이다. 말이 타인과의 관계의 출발점이고 종착점이니 진정한 배려는 타인을 배려하는 말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살아보니 시간이 스승입디다. 어제의 시간이 내일의 스승이더라고요.”

팔십 년을 넘게 살아온 문 이사장에게서는 여전히 강한 삶의 의욕이 보였다. 어제를 되돌아보면서 오늘을 살아가는 문 이사장에게 내일은 또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까. 수많은 사회단체장을 하면서 봉사를 해오고 사회의 리더 역할을 해 온 문 이사장은 여전히 강인하고 삶의 의지가 가득해 보였다. /글 천영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