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안동의 귀래정과 원이 엄마 편지

정면에서 바라본 귀래정.
정면에서 바라본 귀래정.

자연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은 누구나 갖고 있지만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벼슬이 직업인 사대부들은 파직당하거나 은퇴하면 고향으로 돌아가 전원생활을 한다. 그러나 시절이 하 수상하면 벼슬을 던지고 귀거래(歸去來)를 실천하는, 신념으로 사는 선비도 있다. 아니면 처음부터 학문을 닦으며 산림에 묻혀 한평생 전원에서 보내는 산림처사 선비도 있다. 여기 안동의 귀래정은 이광(1440~1516)이 말년에 은퇴하여 지어 몇 년 동안 유유자적한 생활을 했던 곳이다. 그리고 애절한 편지를 쓴 원이엄마의 남편 이응태가 태어나 살던 곳이다.
 

술픔 머금고 서있는 원이엄마 동상과 능소화 한 송이.
술픔 머금고 서있는 원이엄마 동상과 능소화 한 송이.

#. 독특한 귀래정과 도연명의 귀거래사

안동부의 “동남쪽에 있는 귀래정(歸來亭)이라는 정자는 예전에 유수(留水·조선시대에 개성, 황주, 강화, 수원 등 요긴한 곳을 맡아 다스리던 정2품의 벼슬)를 지낸 이광이 지은 것이고 동쪽에 있는 임청각(臨淸閣)은 고성이씨들이 대를 이어 사는 집으로 이것들이 영호루(映湖樓)와 함께 이 고을의 명승지다.” 이중환(1690~1756)이 ‘택리지’에서 귀래정을 이렇게 써놓았다.

이 귀래정과 임청각, 영호루(강 건너로 옮기기 전)는 낙동강가에 서로가 바라볼 수 있는 삼각형으로 위치해 있다. 예전에 단체 답사객들을 데리고 올 때는 버스 세울 때가 없었는데 오늘은 혼자라 주차 걱정은 안 해도 되었다. 하늘의 변화는 수시로 바뀌어 비가 오락가락한다. 강물은 불어 흙탕물에다 건물들이 가득하여 예전 조선시대의 풍경은 상상으로 그리는 수밖에 없다. 이 귀래정을 멋스럽게 지은 이광은 고성 이씨 안동 입향조 이증(1419~1480)의 둘째 아들로 25세에 진사, 40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지평, 성주목사 등을 지내다 갑자사화(甲子士禍)때 한훤당 김굉필(1454~1504)의 일당으로 몰려 관직이 삭탈되었다. 그러다가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1506년)뒤 충청도병마절도사, 경상좌도수군절도사, 개성유수 등을 지내다 1513년(중종 8년)에 나이(74세)가 많아 사직하고 고향 안동에 내려왔다. 낙동강과 임하천이 합수되는 옛 경승지였던 이곳에 도연명의 ‘귀거래사’에 나오는 글 뜻과 흡사하여 ‘귀래정’이라 지었다.

 

동쪽에서 바라본 귀래정.
동쪽에서 바라본 귀래정.

고려와 조선의 한 문장 하는 사람들은 도연명의 귀거래사가 롤 모델을 삼아 귀래정을 많이 지었고 글을 남겼다. 목은 이색(1328~1396)은 독귀거래사(讀歸去來辭)에서 “흰머리 되어 길게 읊조리니 나도 이제 끝이런가./ 문 닫고 그저 ‘귀거래사’나 읽으리라.”했고 신숙주의 아우 신말주(1439~?)는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내몰고 왕이 되자 벼슬을 버리고 순창으로 낙향하여 자신의 호를 딴 귀래정을 짓고 불사이군의 절의를 지키면서 은둔생활을 했다. 농암 이현보(1467~1555)는 1542년(76세)에 은퇴하고 여기 귀래정 위의 낙동강 상류의 예안(지금 안동) 분강 마을로 와서는 명농당(明農堂)을 지어 벽에 도연명의 ‘귀거래도’를 걸어놓고 귀전록(歸田錄) 3수중 ‘효빈가’에서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하며 말만 할뿐 갈 사람은 없네, 잡초 우거진 들판 아니 가면 어찌 할꼬,” 노래하고 장수 집안이라 89세까지 은퇴하고 13년을 강호에 묻혀 살다 갔다.

도연명(365~427)은 동진(東晋)시대 평택현령으로 있을 때 상사에게 굽신거리는 것이 체질에 맞지 않아 “내 어찌 쌀 다섯 말의 봉급을 위하여 그에게 허리를 굽힐 소냐.”며 405년(41살 때) 사직하고 지은 작품이 귀거래사(歸去來辭)이다. “돌아가자! 내 고향 잡초우거진 고향으로…. 지난일 탓한들 부질없음 깨닫고…. 지금 생각 옳고 지난일 그름 이제야 깨닫네.…. 술 단지 끌어당겨 나홀로 한 잔 드니…. 정원을 거닐며 아치를 이루어가고 사립문은 달아 놓았지만 늘 닫혀 있다. …. 고요히 해는 지고 외로이 서있는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나의 마음은 평온으로 돌아온다. 가리라! 돌아가고파 돌아왔는데 다시 무슨 미련을 두랴! 세상과 내가 가는 길 다르니 어찌 다시 벼슬길 구하겠는가…. 부귀는 내 원하는 바가 아니요 신선은 기약할 수가 없네.…. 동쪽 언덕에 올라 노래 부르고 조용히 맑은 물에 가서 시를 지으며 자연의 조화를 따라 돌아가려 하니 천명을 즐길 뿐. 무엇을 의심할 것인가.”

이렇게 전원에 돌아와 23년을 살다가 죽는데 세상 어디에나 현실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돌아온 지 3년 만에 집이 홀랑 불타고 말년에는 가난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술과 시와 문장은 벗 되어 평생을 함께했다.

원이 엄마의 편지 석각.
원이 엄마의 편지 석각.

#. 이응태와 원이엄마의 애달픈 편지

지금이야 폰으로 문자를 주고받고 편지는 거의 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지만, 휴대폰 나오기 전까지는 편지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예전에는 필자도 편지를 많이 썼지만 지금은 거의 하지 않고 아주 드물게 한다. 그러면서도 우체부 아저씨의 빨간 오토바이 올 때마다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늘 편지를 기다린다.

“‘워늬(원이) 아버님께, 아내가’ 자내(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 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어린아이는 누구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자네(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리 해도 나는 살 수가 없어요. 빨리 당신께 가고 싶어요. 어서 나를 데려가 주세요. 당신을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 잊을 수가 없고 서러운 뜻 한이 없습니다. 내 마음 어디에 두고 자식 데리고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 수가 있을까 생각합니다. 이 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자세히 말해주세요. 꿈속에서 당신 말을 자세히 듣고 싶어서 이렇게 써서 넣어 드립니다. …. 당신 내 뱃속의 자식 낳으면 보고 말할 것 있다 하고 그렇게 가시니 뱃속의 자식 낳으면 누구를 아버지라 하라 시는 거지요?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겠습니까? 이런 슬픈 일이 하늘 아래 또 있겠습니까? 당신은 한갓 그곳에 가 계실 뿐이지만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이 서럽겠습니까? 한도 없고 끝도 없어 다 못 쓰고 대강만 적습니다.”

이렇게 끝내놓고 그래도 미련이 남아 “이 편지 자세히 보시고 내 꿈에 와서 당신 모습 자세히 보여주시고 또 말해 주세요. 나는 꿈에는 당신을 볼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몰래 와서 보여주세요. 하고 싶은 말 끝이 없어 이만 적습니다.”

사랑하는 남편을 먼저 보내고 혼자 남은 한 여인의 서럽고 애달픈 사연 담은, 가슴 뭉클한 편지다. 1586년 6월 1일 31살에 죽은 남편 이응태(1556~1586)의 장례까지의 짧은 기간 중에 이렇게 써서 관속 가슴 위에 넣었던 것이다. 그리고 413년 뒤인 1998년 4월 14일 안동 정하동 택지개발로 고성이씨 문중 묘 이장하던 중 이 편지가 나온 것이다.

이 편지는 이응태의 무덤(귀래정에서 500m)에서 나온 75점의 유물 중 하나인데 아버지 이요신, 형 이몽태가 쓴 만시(輓詩), 부채에 쓴 한시, 장신구 등이 나왔다. 이 중 머리맡에서 나온 미투리는 이응태가 병중일 때 원이 엄마가 머리를 잘라 눈물을 삼키며 만든 것이라 또 한 번 깊고도 아픈 사랑을 느낄 수 있다. 미투리를 싼 한지가 훼손이 심했지만, 남아있는 글자 중에 “내 머리 버혀….(머리카락을 잘라 신을 삼았다).” “이 신 신어 보지….(못하고 돌아가셨다)”는 지고지순의 순정이 보인다. 인근의 이응태 할머니 문씨의 묘에서는 온전한 미라가 나왔고, 이응태는 하얀 피부에 수염까지 그대로 있었고, 수의로 180cm의 훤친한 키에 호남형의 장부였음을 알 수 있다.

남편의 옷과 자신(4점), 그리고 어린 아들의 옷(1점)까지 넣은 여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더구나 남편과 꿀 같은 사랑을 나누었던 사이라 슬픔이 극에 달했을 것이다.

원이 엄마 편지 외에 아버지와 형이 쓴 편지 9통도 있었다. 아버지 이요신이 ‘아들 응태에게 부치는 편지(子應台寄書)’에서 묻힌 이의 이름이 ‘응태’임을 알 수 있었고, 형 몽태의 편지에는 “31년 동안 아우와 함께했다”의 글에서 31살에 죽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원이 엄마는 이름도 성도 모른다. 다만 옷의 치수로 160cm 정도의 키에 5살 아들 원이, 그리고 뱃속에 잉태되고 있는 아이가 있었다.

 

서쪽에서 바라본 귀래정.
서쪽에서 바라본 귀래정.

이응태는 여기 귀래정에서 태어나 원이 엄마와 결혼하여 처가에 살다가 병들어 귀래정으로 와서 죽었다. 원이 엄마는 그 뒤 아이들 데리고 ‘진보흥부로 옮겨가 살았음(移居眞寶興阜구)’의 고성이씨 족보의 단서로 친정(영양군 흥구리)으로 가서 한 많은 세월을 보냈을 것이다.

아무도 없는 귀래정을 둘러보았다. 이응태와 원이엄마가 살았던 귀래정은 도로 개설로 묘가 있는 산쪽 20m 정도 옮겨져 집 안에 있던 500년 넘는 은행나무는 집 밖에 있다. 이 은행나무는 그때의 슬픔을 알고 있을 것이다. 집 옆에는 원이엄마의 편지글을 석각해놓았고, 큰 길 건너 안동지청 앞에는 미투리를 가슴에 꼭 안고 있는 원이 엄마의 동상이 슬픔을 머금고 서 있었다. 슬픔에 젖은 능소화도 빗물에 떨어져 뒹굴고, 한 송이 능소화가 슬픔 머금은 원이 엄마를 위로하고 있었다. /글·사진 = 기행작가 이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