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인류가 가진 고전 중의 고전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그리스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서사 예술 양식이었던 서사시와 비극에 대해 이론화한 최초의 것이자 최후의 것이라 할 만하다. 감히 최후의 것이라 과언하는 것은 인간이 어떤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는 극을 접할 때 어떤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는가 하는 것에 대해 아직 이것보다 더 나은 해명이 존재하지 않는 까닭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다룬 ‘서사시’, 그리고 이것에 대한 극적 발전 형태인 ‘비극’은 우리가 널리 알고 있는 그리스의 신화를 그 배경으로 두고 만들어낸 이야기에 바탕을 두고 실연된 극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시학’을 매개로 비극은 지금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소설과 영화, 드라마와 같은 극화된 이야기 양식과 연결된다.

말하자면, 몇 천 년의 시간을 지나고도 인간이 즐기는 이야기의 형태는 그리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갖는 특별함은 지금에 있어서도 어떤 배경 아래 인물을 중심으로 사건을 만들어가는 이야기가 현실을 모방하고 재현해나가는 과정에서 준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치의 형식이나 ‘개연성’의 개념 등을 완성했다는 것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시학’의 진정한 위대함은 바로 비극을 보고 있는 관객의 마음속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그려내는, 관객, 혹은 독자의 심리학의 영역을 최초로 연 사례였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비극은 그 끝까지 완결되어 있고 일정한 크기를 갖는 고귀한 행동의 재현”이며 “작품을 구성하는 부분에 따라 각기 다른 다양한 종류의 양념으로 맞을 낸 언어를 수단으로” 삼고, “비극의 재현은 이야기가 아닌 극의 등장인물에 의해 이루어지며 ‘연민(eleos)’과 ‘두려움(phobos)’을 재현함으로써 그러한 종류의 감정에 대한 카타르시스를 실현한다.” 앞의 것들이 비극의 익숙한 형식적 규정이라면, 뒤의 것은 비극을 바라보는 관객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풍경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책이나 영화를 볼 때, 그 속에 재현되어 있는 우리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이야기들, 그리고 그것을 해나가는 인물을 보면서 그 인물의 현재에 공감한다. 우리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그 속에 있는 인물의 분노에 함께 화를 내고, 그 사람의 처지를 함께 고민하고 걱정하는 것이다. 만약 이런 종류의 ‘연민’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책이나 영화, 드라마를 보는 경험은 그저 밋밋한 활동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두려움’은 어떤 감정일까. 이것에 대해서는 여러 이견이 있지만, 나는 내가 보고 있는 인물에게 다가올 운명이 실제로 다가올까 두려워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오이디푸스’에서 주인공에게 내려진 끔찍한 신탁, 즉 신의 예언이 실현될까봐 두려워하는,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신탁대로 해버렸음을 주인공이 알게 될까 하는 두려움은 관객을 비극이 그리는 긴장의 고개로 끌고 올라간다. 마치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 아무 것도 모르는 천진한 태도로,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위험 속으로, 자박자박 걸어 들어갈 때 관객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긴장과 같다.

극의 절정 부분에서 압축되어 터지기 직전의 긴장은 폭발하고, 관객에게는 감정적 해소가 찾아온다. 바로 ‘카타르시스’의 순간이다. 두 연인의 오해를 지켜보던 관객의 마음속 긴장감이 터져버리는 순간, 악행과 복수의 고리로 연결된 두 사람이 결국 마지막 대립하는 순간, 운명의 장난으로 고생하다 그것으로부터 빠져나오는 순간, 관객은 터져 나오는 감정의 잔여물들이 범벅된 상태로 읽던 책을 마치거나 영화관을 나서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이야기를 향유하는 이같은 경험은 가장 인간다운 것이기에, 오랫동안 변화하지 않은 만큼 더 오래 계속될지도 모른다. 지금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읽어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홍익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