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진 자리
꽃 진 자리
  • 등록일 2020.08.05 19:43
  • 게재일 2020.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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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소화가 집니다. 무너진 꽃잎들, 담장 아래로 붉은 꽃그림자를 이룹니다. 오점의 예견도 없이 추락의 예감도 없이, 찢어지고 오므라들다 마침내 누렇게 타들어갑니다. 담담한 생의 끝자락에서 스스로 길을 내는 저 화흔(花痕)들. 제아무리 화려하고 향기로운 꽃도 지고 나면 찐득한 상처를 남깁니다.

그 상처는 아이러니하게도 우연에 기댈 때가 많습니다. 꽃나무로 마당에 발을 들이는 순간, 운명이 된 우연은 상처인 줄도 모르고 꽃을 피웁니다. 그러다 돌풍 실은 바닷바람 한 점에, 여름을 재촉하는 다급한 장맛비 한 방울에 꽃잎을 떨굽니다. 일견 화려한 꽃이 안타까운 꽃 무덤으로 보이는 순간입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건 너무 당연한 자연현상일 뿐입니다.

진물로 끈적이는 그 자리는 끝이 아닙니다. 결코 흉물스럽지도 않습니다. 생의 이면을 날 것으로 보여주는 고해성소입니다. 살다보면 사물이나 사람을 그릇 이해할 때가 있습니다. 넘치는 욕심에 상대를 궁지로 몰아넣고, 어림없는 오해로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작은 우연에서 시작될 때가 많습니다. 꽃 진 자리는 이러한 우연이 마련한 통곡의 바다이자 상처의 실존입니다.

하지만 그 상처는 힘이 됩니다. 그것으로 새로운 꽃망울을 말아 올릴 수 있으니까요. 결곡하게 피운 꽃은 또다시 향을 내뿜고 열매로 보답합니다.

칠월의 꽃 능소화, 그 꽃 진 자리는 서러움도 추함도 아닙니다. 죽음이 아니라 또 다른 생의 시작점입니다. 곡진 생의 사이클을 보여주는 가장 선명한 증거물입니다. 그 상처가 풍화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립니다. 그 안에서 몇 번의 개화와 몇 번의 낙화가 필연처럼 이어집니다. 싹틈 또는 꽃피움으로 이어지는 환희의 이미지, 그것이 자연의 전부는 아닙니다. 필연으로 이어지는 떨굼 또는 추락의 순환까지 거쳐야 완전체의 자연이 되는 것이지요.

생각하면 모든 결실은 추락이 그 시작이었지요. 떨어져보지 않는 시간은 가짜입니다. 더럽혀지지 않은 추억은 엉터리이지요. 뭉개져보지 않은 열매는 껍데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 생애, 깊어지거나 단단해졌다면 그 모든 것은 충분히 꽃 진 자리를 살폈다는 뜻이겠지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시절의 환희와 절정, 우연처럼 이어지는 청춘의 혼란과 불안. 짓무른 그 시간의 힘으로 다시 꽃망울을 맺고 피는 중년, 머잖아 운명처럼 맞이할 노년의 허무와 고독. 숨 쉬는 한 우리 삶은 비상과 추락의 변증법을 연주합니다. 저 먼 우주의 먼지로 사라지는 그 순간까지 무대 위 그 사이클은 계속됩니다.

누군가 묻습니다. 어느 때로 돌아가고 싶으냐고. 망설임 없이 대답합니다. 지금 이 순간 말고는 어느 시절로도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혹시라도 이십대 시절은 어떠냐고 묻는다면 고개를 완강히 젓겠습니다. 끝없이 흔들리고 하염없이 추락하던 한 시절이었으니까요. 결실 없던 열매, 비상 없던 날개의 나날만 지속되었지요. 새벽이 올 때까지 무너지던 버거운 한 시절은 그것으로 족합니다.

김살로메소설가
김살로메
소설가

지금의 청춘들도 별달라 보이지 않는 경우가 있겠지요. 하지만 짓무른 꽃잎 같은 시간 없이 어떻게 단련할 수 있을까요. 하염없이 떨어져본 나날들은 알게 모르게 스스로를 단단하게 부릴 줄 압니다. 싹 틔우는 모든 힘은 한 시절의 상처가 원동력이 되니까요. 떨어진 꽃잎의 선명한 아픔을 겪었기 때문에 굳건한 힘으로 일어설 수 있는 것이지요. 꽃의 진실은 피어서 화사하느냐, 떨어져 시드냐가 아니라 꽃 자체의 한 살이에 있습니다. 피는 꽃은 화사해서 아름답고 지는 꽃은 안타까워서 눈물겹습니다. 그러니 꽃 진 그 자리, 처절한 아름다움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핀 꽃의 진실은 나뭇가지에 달리지만 진 꽃의 진실은 꽃 진 바위에 내려앉습니다. 꽃 진 자리를 톺아봅니다. 누군가 꽃 핀 자리에 눈을 높이 맞출 때, 누군가는 녹아내린 꽃무덤 속으로 마음을 보탭니다.

그 속에서 생환의 뿌리를 다지고 활력의 가지를 뻗는 나무를 봅니다. 꽃 핀 나무가 단순히 밝은 눈을 선사할 때, 꽃 진 자리는 성찰이라는 깊은 우물을 보여줍니다. 생과 멸로 이어지는 이 우주적 질서는 아름다운 추락이자 처절한 비상으로 명명할 수 있겠습니다.

꽃 진 그 시간을 최상의 것으로 추억하기 위해 저마다 길을 냅니다. 구구절절 말을 잇긴 했지만, 실상 떨어진 꽃잎은 해석이 필요치 않습니다. 이해되기 전에 전달되는 그 무엇이기 때문입니다. 실존의 상처로 단련된 꽃무덤은 그 자체가 사유의 통로가 됩니다. 필연으로 떨어져 꽃길을 내고, 깊이 내려가 진물을 이루는 모든 것은 생의 이면입니다. 견고한 잉태와 단단한 도약을 위한 전초전입니다. 절절하게 떨어져 본 꽃잎일수록 절실하게 꽃피우는 자양분이 됩니다. 꽃 진 자리는 자신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추락 없는 꽃잎이 어디 있으며 짓무름 없는 성장이 가당키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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