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휘 논설위원
안재휘
논설위원

‘자판기’는 인류문명을 바꾼 획기적인 발명이었다. 지난 2010년 아랍에미리트공화국(UAE)의 최고급 호텔 에미레이트 펠리스에 처음으로 금(골드 바) 자판기가 등장해서 화제가 됐다. 지난 2018년 중국의 공룡 기업 알리바바는 미국 자동차회사 포드와 손잡고 자동차 자판기를 등장시켜 해외토픽난을 뜨겁게 달궜었다. 모바일 앱으로 자동차를 구매하는데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작금 21대 국회에서 벌어지는 초 스피드 법률 통과는 더 놀라운 ‘자판기’ 기록이 될 것 같다. 더불어민주당은 지난달 29일 ‘임대차 3법’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후속법안’을 국회 상임위원회에서 전광석화처럼 통과시켰다. 통상적으로 국회는 상임위에 법안이 회부되면 대체토론, 소위 심사보고, 축조심사, 찬반 토론, 의결(표결)의 순서를 거치는데 이날 국회 상임위들은 짜 맞춘 듯이 모든 절차를 생략했다.

민주당은 이어서 30일에는 본회의를 열고 주택임대차보호법 개정안을 재석 187명 가운데 찬성 185명, 기권 2명으로 의결했다. 법안의 본회의 상정부터 가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25분이었다. 군사독재정권 때도 좀처럼 못 보던 ‘입법 독재’의 활극이 펼쳐진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수십 년 국회 입법 프로세스를 한순간에 무너뜨린 횡포의 뒤에는 교졸한 ‘법 기술’이 있었다.

여당 국회의원들 입에서는 ‘소위원회는 강제조항이 아니다’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국회법 제57조(소위원회) 1항을 보니 ‘필요한 경우 특정한 안건의 심사를 위하여 소위원회를 둘 수 있다’고 돼 있는 건 맞다. 민주당은 ‘둘 수 있다’는 대목을 ‘안 해도 된다’로 읽어 자기들 법안만을 짜깁기해서 통과시켰다. 분석도 안 된 법안을 기립통과 방식으로 처리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거수기’ 행태였다.

아무리 좋은 명약이라도 약에는 반드시 ‘부작용’이 있다. 유해한 요소가 있는지 없는지 철저하게 조사한 다음 시장에 내놓는 것은 상식이다. ‘부동산 3법’이 제아무리 좋은 제도일지라도 마지막으로 정리된 대체입법에 대한 국회 전문위원들의 검토보고조차 거치지 않은 것은 민주당의 치명적인 실수다.

“학생운동 세대의 엘리트 그룹과 이른바 ‘빠’ 세력의 내밀한 친화성이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불러오고 있다”며 문재인 정권의 ‘전체주의’를 우려한 진보학자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의 지적이 눈에 띈다. ‘결과’ 중심으로 ‘속전속결’만을 도모하는 정치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박정희 시대에 유정회를 만들어 부린 일이 우리 정치사에 부끄러운 흔적이듯, ‘결과 지상주의’에 빠진 민주당의 행태는 수치스러운 역사로 기록될 가능성인 높다. ‘통법부’ 행태를 주도하고도 “야당이 양보해야 한다”고 우기고, “통합당이 민주주의 기본 작동 원리부터 다시 생각할 때”라는 적반하장을 서슴지 않는 여당 인사들의 막무가내 언행에 억장이 막힌다.

이 엉터리 ‘자판기’ 국회 행태를 ‘민주주의’로 잘못 배우고 있을 아이들이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