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화진<br>영남대 객원교수·전 경북지방경찰청장
박화진
영남대 객원교수·전 경북지방경찰청장

젓가락, 가위 같은 물건은 짝이 있어야 제구실을 한다. 신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신발짝이라 불린다. 신발은 경제발전의 척도다. 아직도 아프리카 오지나라나 지구촌 구석에는 맨발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해방과 6·25 전란 이후에 고무신 패션이 주류를 이루었다. 중장년층은 백고무신, 조무래기들은 검정고무신이다. 생필품인 고무신이 부정선거 현장에서 공공연한 사은품으로 나돌만한 이유였다. 낡은 미제 군화는 전란이 남긴 캠퍼스의 가난한 낭만이다.

어린 시절 한 동안 검정고무신을 사계절 신고 다녔다. 여름철은 제격이다. 개울가를 건너거나 비가 오더라도 툴툴 털거나 말리면 된다. 발등 부분은 박세리의 발등, IMF의 시름을 한방에 날릴 때 보여준 선명한 흑백의 대비가 생긴다.

겨울은 괴로운 계절이다. 발등을 아리는 찬 공기를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래도 질기고 값싼 탓에 자식 많은 집에서 아이들 생필품으로 딱이었다. 부동의 자리를 지킬 줄 알았던 고무신은 ‘잘살아보세’ 기치아래 전 국민이 허리띠 졸라맨 노력의 결실로 운동화와 구두가 등장하며 명을 다하게 되었다. 새로 등장한 운동화는 온갖 기능들이 장착된 지금의 브랜드 운동화와는 천양지차 품질이다.

새신을 신고 팔짝 뛰는 대신에 날아오는 축구공을 되받아 차다가는 조악한 헝겊으로 된 신등이 처참하게 찢어지는 아픔을 감수해야 한다.

부모님의 성난 얼굴이 말풍선이 되어 머리위에 떠오르는 부작용은 뒷감당이 불감당이다. 그래도 명절이면 연례행사처럼 받을 수 있는 운동화 한 켤레를 이불 속에 안고 행복감에 젖어 잠들곤 했다. 요즘 세대들은 조선시대 짚신 신은 얘기처럼 들릴지 모르겠다. 고무신의 장점이 운동화의 단점이다. 물로 쉽게 씻던 고무신과 달리 천으로 된 운동화는 세탁이 만만찮은 일이었다. 비누칠을 해서 싹싹. 옷을 빨듯이 해야 한다. 흰 고무 테두리를 더욱 희게 하려고 치약을 살짝 발라 문지르는 비법도 구사했다.

사춘기 소녀들의 맵시내기 비법일 것이다. 신발에 한 맺힌 민족마냥 신발 산업은 경제발전에서 단연 효자 종목이었다. 우리의 경제성장 상징으로 여겨지는 신발 한 짝이 날아간 일로 나라 한 쪽이 얼마간 술렁이고 떠들썩했다. 중년의 한 남자가 집에 신발이 남아돌지는 않을텐데 나라님 행차 길에 던졌단다. 나라님께 할 말이 있다는 의사표시라고 한다. 사직 당국은 테러분자의 소행으로 본 건지 구속을 시키겠다고 했다. 영장이 기각되어 영어(囹圄)의 몸 신세는 면했지만 법원의 최종판정을 받는 절차가 남았다. 신문고를 치는 북채 대신에 신발을 던진 행위라는 항변도 있다.

독립운동을 한 열사에 버금가는 신발열사라는 신조어도 생겼다. ‘폭탄이었으면 어쩔뻔했냐’며 과도하게 호들갑을 떠는 사직당국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다. ‘허, 허, 허’하고 너털웃음으로 사람 좋게 보였던 나라님의 관대한 아량을 바라는 것은 지나친 기대일지 모르겠다.

그런데 ‘한 쪽 발이 맨발인 상태로 연행돼갔다면 혹시 인권침해?, 워낙 인권을 챙기는 나라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