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
⑧ 양남 주상절리와 파도소리길

경주 양남에는 주상절리를 배경으로 해변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경주 양남에는 주상절리를 배경으로 해변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도시는 특유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입에서 발음되는 순간, 그 즉시 연속적으로 떠오르는 풍경이 있다는 말이다. 그런 차원에서 보자면 경주가 가진 이미지는 고풍스럽고 묵직하다.

천년 세월 동안 이름을 간직한 오래된 사찰, 거대하고 부드러운 반구(半球)의 형상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수많은 고분들, 남산에 뿌리를 내리고 세파를 견디며 숲을 이룬 부드럽게 굽은 소나무….

경주는 위와 같은 이미지로 사람들에게 다가선다. 진녹색의 풍경 속에 자리한 고색창연한 도시 서라벌. 이는 산과 가람, 왕릉 등이 결합해 만들어낸 압도적인 이미지다.

그래서일까? 경주를 찾은 여행자들이 가장 먼저 ‘바다’를 떠올리는 경우는 드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경주에도 바다가 있다. 그것도 청량한 파도 소리가 귓전을 간질이는 아름답고 매혹적인 바다.

“앞으로는 장마와 더위가 긴 기간 이어질 것”이란 기상 예보가 들려온 7월 하순 어느 날 오후. 낭만적인 피서지를 찾아 경주 시내를 벗어나 양남면을 향했다.

승용차로는 약 40~50분, 경주시외·고속버스터미널에서 시내버스를 타도 1시간 10분이면 닿을 수 있는 곳에 ‘서라벌의 푸른 보물’이 있으니, 바로 ‘주상절리(柱狀節理)’와 ‘파도소리길’이다.

 

주상절리군 ‘천년기념물 제536호’ 지정
부채꼴 형태는 세계적으로도 희귀 모양
위로 솟거나 누워 있거나 기울어지기도

파도소리길 1.7km 산책로 걷다보면
카페·펜션·구름다리 등 힐링코스 ‘딱’
전망대선 바다경치·주상절리 한눈에

◆ 기묘한 형상으로 사람들을 반기는 양남 주상절리

차에서 내려 바다를 향해 걸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눈앞에 기기묘묘한 형상의 바위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마치 검은 병풍을 눕혀놓은 듯한 모습을 한 양남 주상절리다. 경주시 문화관광 홈페이지는 이 풍경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2012년 양남면 읍천리에 자리했던 군부대가 옮겨가면서 숨겨져 있던 보물이 세상에 나왔다. 파도, 바람, 바위, 시간이 빚어낸 보물 양남 주상절리군(群)이다. 주상절리는 화산암 지대에서 발견할 수 있는 위로 솟은 모양의 육각형 돌기둥을 뜻한다.

양남 주상절리군에서는 위로 솟은 주상절리뿐만 아니라, 부채꼴 주상절리, 기울어진 주상절리, 누워있는 주상절리 등 다양한 형태의 주상절리를 관찰할 수 있다. 발달 규모와 형태의 다양성을 인정받아 천연기념물 제536호로 지정됐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둥글게 펼쳐진 부채꼴 주상절리. 이는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희귀한 형태다.”

주상(柱狀)은 기둥의 형상, 절리(節理)는 암석에서 볼 수 있는 나란한 결, 또는 갈라진 틈을 의미한다. 그러니 주상절리란 나란한 결로 갈라진 기둥 형태의 바위라고 보면 될 듯하다.

여행자가 걸어 다닐 수 있는 길에서 바로 내려다보이는 양남의 주상절리는 제주도 중문의 주상절리와는 또 다른 매력을 뽐낸다. 몇 해 전. 비행기를 타고 가서 본 제주의 주상절리는 바다와 대립된 수직의 자세로 우뚝 서서 밀려오는 파도를 꺾으며, 하얀 포말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웅장하고 남성적인 모습이었다.

반면 경주의 주상절리는 파란 물결과 하나가 되려는 듯 바다를 향해 발을 뻗고 있는 수평의 형태다. 제주의 그것에 비해 작은 규모지만 온화하고 여성적으로 느껴졌다.

자연이 펼치는 마술은 인간이 흉내낼 수 없는 영역이다.

자연과학적으로 설명하자면 주상절리란 화산 활동으로 인해 생긴 것이겠지만, 양남 바닷가에서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만난 주상절리는 자연이란 마법사가 사람들의 감탄을 불러내기 위해 만들어놓은 ‘기묘한 예술품’으로 다가왔다.

양남 주상절리가 형성된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2천600만 년 전으로 추정된다. 감히 상상하기도 어려운 까마득한 시간의 저편.

지금 기자가 보고 있는 풍경을 1천500년 전 신라인들도 봤다고 생각하니 물리학자들이 말하는 ‘시간의 연속성’이 실감으로 전해진다.

제대로 된 교통편이 없었던 옛날. 서라벌의 소년들은 무리 지어 모험을 떠나듯 발걸음을 재촉해 동남쪽 양남 바닷가로 더위를 피해 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중 하나는 주상절리 끝자락에서 몸을 던져 함께 온 친구들에게 수영 실력을 과시하지 않았을까? 변변한 수영복도 없이.

한없이 평화로운 해변 풍광 속에서 접혀 있던 상상력의 날개를 펴는 짙푸른 경주의 여름. 너무나 아름다워 혼자 즐기기엔 아까웠다.

 

병풍을 눕혀놓은 것 같은 독특한 형태의 양남 주상절리.   /경주시 제공
병풍을 눕혀놓은 것 같은 독특한 형태의 양남 주상절리. /경주시 제공

◆ 신경림의 시를 떠올리게 하는 파도소리길

‘일상’이라는 이름의 감옥 속에 갇혀 있던 현대인들에게 돌아가고픈 원시의 풍경을 선물하는 경주의 바다. 여기까지 왔으니 1시간쯤 할애해 잘 정돈된 해변 산책로를 걸어보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을까?

양남엔 괜찮은 음식점과 근사한 카페가 적지 않다. 가볍게 요기부터 한 후 얼음 섞인 차가운 커피 한 잔을 사들고 ‘파도소리길’에 들어섰다.

누구의 작명인지 몰라도 산책로 이름을 기막히게 잘 지었다. 초입에서부터 무더위를 저 멀리 내쫓는 시원스런 파도 소리가 여행자를 반긴다.

들머리에 1.7km 가량 이어지는 파도소리길에 대한 경주시의 친절한 설명이 안내판에 적혀 있다.

“양남 주상절리를 곁에 두고 거닐 수 있도록 읍천항에서 하서항에 이르는 해안 산책로 ‘주상절리 파도소리길’이 조성됐다. 데크로드, 정자, 벤치, 구름다리 등이 잘 정비돼 있고, 중간엔 주상절리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도 있으니 꼭 찾아보시길 권한다.”

앞서 걷는 어린 아들과 젊은 아버지의 등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둘은 무슨 이야기를 저토록 비밀스럽게 나누고 있는 것일지. 부자의 뒷모습이 먼 기억 안에서 사람살이의 풍경을 노래한 시인 신경림(84)의 ‘동해 바다’를 소환시켰다. 그 절창 중 한 대목을 아래 옮긴다.

‘멀리 동해 바다를 내려다보며 생각한다

널따란 바다처럼 너그러워질 수는 없을까

깊고 짙푸른 바다처럼

감싸고 끌어안고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스스로는 억센 파도로 다스리면서

제 몸은 맵고 모진 매로 채찍질하면서.’

20~30년을 먼저 냉혹한 세상과 정면으로 부딪치며 살아온 아버지. 아직 물정 어두운 아들에게 조그만 충고라도 해주고 싶은 게 인지상정. 신경림의 시는 바로 그런 아버지의 애틋한 마음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는 아들이 타인에게는 너그럽고, 자신에겐 엄정하기를 내심 기대한다. 그런 이타적인 사람으로 커가길 열망한다. 그건 15세기 전 서라벌 아버지나, 2020년 오늘의 아버지가 다르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경주의 바다도 아름답다는 걸 보여주는 주상절리 풍경. /경주시 제공
경주의 바다도 아름답다는 걸 보여주는 주상절리 풍경. /경주시 제공

◆ 어때요? ‘생명의 시원’ 바다로 떠나는 경주 여행

양남 주상절리를 옆에 끼고 해변 산책로를 다정하게 걸어가는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국문학자 김윤식(1936~2018)이 말한 ‘존재의 시원(始原)’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거기서 의미를 조금 더 넓혀 드넓은 바다를 떠올린다. 인간의 생성과 소멸이 좁은 차원에서의 ‘존재’ 문제라면, 보다 확장된 의미로서의 지구 위 모든 ‘생명’은 바로 바다에 그 시원을 두고 있지 않은가. 지금 우리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는 모든 것이 움트고 생겨난 곳.

길었던 여름 하루가 지는 해와 함께 까무룩 사라지는 양남 바닷가. 드문드문 오렌지 빛 불빛이 켜지기 시작했다. 다정한 부자는 자신들이 왔던 곳으로 돌아갈 시간임을 알고 주상절리 검은 바위와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기자 역시 기대 이상의 감흥을 선사한 경주의 여름 바다에 작별을 고했다. ‘곧 다시 찾아올 것’이란 소리 없는 약속을 전하며.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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